무목사 메세지/성경 속 주연들

[성경 속 주연] #7-2 야곱,벧엘로 돌아가라

제주한교회 2020. 6. 18. 17:18

첫사랑을 기억하라

야곱의 삶은 전형적인 모태신앙의 삶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서 3대째 이어온 신앙의 가문이죠. 그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온 야곱의 신앙을 4가지로 나타납니다.

1. 혈통적 신앙입니다.

할아버지도 믿고, 아버지도 믿고, 할머니, 어머니 모든 가족들이 하나님을 믿는 가문에서 태어났죠. 흔히 이야기하는 모태신앙으로 야곱은 도대체 다른 신들은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할 겁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수행평가로 각각의 집에서 하는 제사상의 모습을 적어오라고 했는데 모태신앙으로 자라온 저는 제사상은 TV에서만 보았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어느 교회에 가던지 대충 주보만 봐도 “야 이 교회는 이렇구나” 설교 본문이나, 제목만 보아도 대충 어떤 설교일지 예상이 되는데 제사상은 전혀 모르는 저의 모태신앙으로의 삶처럼 야곱의 삶도 그랬을 겁니다. 축복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이 느껴지는건 제 착각이겠죠?

2. 듣는 신앙입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야곱은 평생 하나님에 대해서 부모님을 통해서 들어왔을 겁니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부터 귀에 박히도록 들어왔을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가 태어나면 토라(Tora), 모세오경을 틀어준다고 합니다.
요즘 새로 바뀐 주기도문, 사도신경은 헷갈려서 버벅대지만 예전버전의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은 한번도 외워본 적이 없지만 하도 많이 들어서 시작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줄 외워갑니다.

3. 배우는 신앙입니다.

헌금이 뭔지도 모르는데 어머니가 주일아침마다 쥐어주는 1,000원짜리 한 장을 헌금하면서 헌금을 배워왔던 것처럼 야곱은 흠과 점이 없는 어린양을 어떻게 잡는지 어떻게 제사를 드리는지 배우는 시간입니다.

4. 습관적 신앙입니다.

주일만 되면 교회로 가는 것처럼, 야곱도 마찬가지로 때만 되면 제사를, 예배를 드리고 반복적으로 행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집, 브엘세바에서의 야곱의 신앙은 듣고, 배우고, 습관적인 신앙이지만, 하나님이 존재하고 복 주신다는 것을 알았던 겁니다, 그렇기에 형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사고, 에서에서 복 주려는 이삭 앞에 염소털로 살을 감싸고 에서의 옷을 입어 속여 축복 기도를 받습니다. 그렇게 복을 바라고 복을 받았다 생각한 그 다음 상황은 복된 상황이 아닙니다. 아버지만 돌아가시면 자신을 죽이려는 형 에서를 피해 삼촌 라반의 집으로 야반도주 합니다.

[창27:43-45]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분명 복을 바라고 이삭에게 축복 기도를 받은 야곱이 맞이한 현실은 복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려는 형을 피해 야반도주하여 맞이하는 광야 사막길입니다.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땅으로 올라가는 그 광야길 가운데 날이 어두워지자 루스라는 땅에서 누워서 잠을 청합니다. 얼마나 마음이 가난하고 착잡할까요 상상이 안됩니다.

그런데 이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옵니다. 더 이상 야곱은 혈통적 신앙이나, 듣고 배우고 습관적인 신앙의 삶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혈통적 신앙, 육적 신앙이 아닌 영적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듣고, 배우고 습관을 따라가는 신앙이 변하여 눈으로 보고, 체험하고, 감동적인 신앙이 바뀐 겁니다. 야곱의 눈이 뜨였을 때 그 곳은 더 이상 광야가 아니라 ‘벧엘’ 하나님의 집이 되었습니다.

욥기 42장 5절에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라고 기록된것처럼 듣는 믿음이 보는 믿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 듣고 교회에 다니는 이 삶이 아버지 이삭의 집에서 야곱이 받은 복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복음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복음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 복 이후에는 광야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잘 될 줄 알았는데 앞에는 광야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이 모두 우릴 버린 것만 같고 예수님 믿어서 그런 것 같고 온갖 생각이 다 드는 시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아버지 이삭의 안전한 집에서 황량하고 거친 광야로 내몬 것처럼, 노예이면서도 먹을것이 풍부하던 이집트를 떠나 광야길을 걸어간 이스라엘 백성처럼,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광풍이 부는 갈릴리 바다로 나아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희망이 없는 그 광야길이 하늘문이 열리면, 더 이상 광야가 아니라 벧엘이 되는 것처럼 하늘문이 열리지 않으면 그 곳은 여전히 광야입니다.

벧엘로 돌아가라
[창35:1-2]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오늘 본문에서는(드디어 오늘 본문입니다.) 야곱의 노년의 때에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벧엘로 돌아가라고 야곱에게 이야기합니다.
복받고, 광야길 가운데서 하늘문을 보는 체험을 하지만 야곱에게는 이스라엘이 되어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다시 벧엘로 돌아가는데는 그 전과는 다른 훨씬 어려운 장애물이 있습니다.

1)라반을 떠나야 하고,
2)얍복강에서 환도뼈가 부러져라 메달리고
3)이방신상을 모두 버리고
4)몸을 깨끗이 씻어 정결케하고
5)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다시 벧엘로 돌아가는 길을 더 어렵습니다. 믿음의 여정이라는 것이 쉬운 길은 분명히 아닙니다. 환도뼈가 아작이 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자리, 남들의 눈에는 광야의 길일지 모르는 그 벧엘로 돌아가야 합니다.

계시록 2장 4절에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벧엘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고난의 길을 걸아가고 있다면 축하드립니다. 이제 그 고난길이 벧엘이 되는 길만 남았습니다. 낮은 곳에 온 것을 환영하고 동행하는 인생의 시작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