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8-41장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이사야 38-41장
1. 이사야 38장에는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되었다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병이 낫고 15년의 생명을 연장하게 된 사건과 그것의 확실함의 징조인 시간이 후진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성경에서 매우 유명한 부분이지만 이것을 깊이 이해하는 것은 만만치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기도하여 응답받는 것은 당연한 진리이고 내용이지만 본문에 소개될 때는 이것이 치열한 역사의 현장 속에서 개인의 사소한 소원과 해답을 넘어선 인과율 속에서 하나님의 개입이 어떻게 일어나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원칙과 질서를 어떻게 우리에게 이해하게 하시며, 어떻게 개입하시는 지에 대한, 어떤 것이 세상의 것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됩니다. 3절을 보면 기도의 조건 같이 히스기야의 기도가 나타납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이사야 38:3)
히스기야의 기도에는 기도의 성립, 곧 응답의 조건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어렵습니다. 기도를 응답받을 만한 선행과 자격과 간절함이 응답받는 기도의 조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시간이 그 자연의 법칙을 깨고 움직이는 것도 간단히 아멘으로 응답하기에는 이해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우선 기도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3. 요한복음 14장에 가면 빌립의 요청이 나옵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한 14:8)
빌립의 질문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보여주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메시아인데 그가 하나님이랍니다. 빌립의 생각 속에는 하나님이 세상이라는 창조세계에 들어오는 것 만으로 세상에 큰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이시라면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꾸로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한 14:9)
예수님은 네가 나를 보고도 모르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은 세상보다 크고, 하늘보다 높아서 세상이 그를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나는 세상 속에 들어와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를 주장할 수 있다는 말씀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4.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초자연적인 크기로 다가온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아지신 것, 곧 성육신의 모습으로, 우리가 보기에 우리와 다를 것이 없는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우리에게 구원으로 적용되는데, 그 방법이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육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데, 우리 눈에 아무리 보아도 만만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나사렛에서 사신 것입니다. 이것을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5. 성경은 하나님의 증언이 예수님 안에서 온전하고 충만하여 최고의 능력이고 영광이라고 증언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한 14:11a) 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육체 속에 거하실 수 있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한 14:11b)고 하십니다. 행하는 그 일은 예수님의 구체적인 인생으로 기적을 일으키과 변화산의 모습만이 아니라 일상의 모습, 배고프고, 웃고, 울고, 죽음에서까지의 모습을 통해서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6. 그리고 나서 기도가 허락이 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여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한 14:13-14)
기도는 간절함만이 아니라, 또 하나님의 초월된 권세나 능력을 통해서 드러나는 방법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일하심을 근거로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체적인 일하심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일하심입니다.
7. 이 과정을 잘 보면, 기도는 ‘관계’를 근거로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그 관계있음이 기도의 근거가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통해서 무엇이 일어나고 이루어졌기에 예수님이 기도의 근거가 되시는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한 17:2-4)
8.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인간으로 오게 하시고, 모든 인류가 가는 길을 걷게 하셨고 살게 하셨습니다. 창조자이고 전능자이셨지만 육체를 입고 한계속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존재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 조건에서 겪어야 하는 모든 일, 고난, 모욕, 배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육신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아지신 것으로, 하나님이 우리 편을 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기적이나 해가 멈추는 것은 비교되지 않는 매우 실존적인 은혜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편드실 만한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성육신으로 우리편을 드시는 바람에, 사망도 악한 영도, 사탄도, 죄도, 그 무엇도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9. 하나님은 별을 움직이거나, 벼락이 치는 것으로 자기를 자랑하지 않으시고, 우리 편이심을 자랑삼고 뿌듯해 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나는 자랑할 만하지 않은데 하나님은 당신의 명예를 우리에게 거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 뿐만이 아니라 인생살이의 매우 중요한 기초요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한 17:22)
여기 ‘내게 주신 영광’은 예수님께서 한계에 붙잡히신 것, 인생이 되신 것을 영광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는 내가 사람이 되어 사는 것, 그들 역시 그것으로 이 땅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때로 지긋지긋하고, 빨리 세상을 떠나 하나님 곁으로 가는 것이 영광이 아니라 고생스러운 인생이 영광이라고 하십니다. 인생은 빨리 벗어야할 비극이 아니고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사용하는 ‘영광’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명예나 성공을 얻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내게 주신 영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생명을 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을 영광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영광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권세나 성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생명을 살리는 영광’을 영광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치관이 변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수준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10. 그러면 히스기야의 기도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기도의 무엇을 드러내시는가? 그의 기도는 그의 영광과 지위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자꾸 히스기야가 기도해서 15년을 더 산것을 생각합니다. 15년을 더 살아도 인간은 죽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우리가 더 잘살려고 오래살려고 간절히 기도해서 응답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히스기야는 신실했지만 안팍으로 위기가 많았고, 오늘 우리가 그러하듯이 기막힐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인간이라는 ‘한계’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은 ‘영광’이라고 하십니다.
영광은 내가 사랑하는 자와 관계있음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는 자신이 하나님과 관계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것이 그의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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