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 미니스트리

에스겔 1-4장

제주한교회 2020. 9. 25. 13:01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에스겔 1-4장

1. “서른 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에스겔 1:1-2)

‘서른 째 해’는 에스겔의 나이입니다. 그때가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이 된 때입니다. 여호야긴은 느부갓네살의 2차 침공 때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25세에 잡혀와서 오 년이 지난 것입니다. 25세에서 30세,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런 중요한 때에 그는 그발 강가에 나와있습니다. 그러면 에스겔서를 어떻게 걸어야 할까요? 25-30살 나이에 한강 다리에 올라가 서있는 심정으로 걸어야 합니다.

2. 사람들이 언제 강가에 나가나요? 한강 다리에 가면,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생명은 소중합니다.’ 이런 글이 붙어 있을 것입니다. 여기 ‘그발 강가에서’라는 말씀은 에스겔의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주전 605년, 군사력을 앞세운 바벨론은 남왕국 유다를 침략하여 다니엘과 유다의 지도자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갑니다. 그 일이 있은 후 8년째 되던 해(주전 597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중동장악의 일환으로 남왕국 유다를 재침략하여 유다 왕 여호야긴과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다시금 바벨론으로 붙잡아 갑니다. 그 포로들 중에 에스겔이 있었습니다.

3. 에스겔의 예언 활동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주전 587년까지는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합니다.

반면에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는 그의 임무가 바뀌어 오히려 하나님의 회복에 관하여 예언합니다. 이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그 목적이 멸망이 아니라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고난과 아픔의 세월을 사는 자가 있어서, 그 인생이 심판처럼 느껴진다 하여도 그 인생이 하나님 안에 있는 한 그는 회복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인생의 고난과 아픔은 하나님의 ‘자녀 만들기’입니다.

4.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에스겔 1:1-2)

여전히 폐위된 왕, 여호야긴의 통치 연대로 날짜를 기록하는 것을 보니, 자존심 강한 유다 민족의 비애가 느껴집니다. 서른 살이 되어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할 나이가 된 에스겔이었지만, 그가 서 있는 곳은 찬란한 예루살렘 성이 아닌 버려진 도시의 그발 강가였습니다. 이러한 유대 민족의 비통함이 시137편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5.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시편 137:1-4)

그발 강 가를 향해 자조의 눈길을 보내던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이상을 보이시며 새로운 직무를 부여하셨습니다. 성경은 이 상황을 “하늘이 열리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 희망을 생각할 수 없는 상황, 바로 그 순간에 언제나 하나님은 하늘을 여십니다.

6.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에스겔 1:3)

여기에 빠진 번역이 하나 있습니다.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라는 말씀 앞에 ‘샴’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뜻은 ‘거기에’입니다. 이것을 다시 번역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사로잡혀 가 있는 현장, 포로 가운데 있는 그 현실 한 가운데에, ‘거기에’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7. 에스겔서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가면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에스겔 48:35)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 ‘삼마’가 ‘샴’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8. ‘거기’는 모든 것이 끝난, 멸망 이후에 너무나 고통스러운 거기, 절망과 좌절의 자리인 ‘거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동행하십니다.

9. 이제 에스겔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여호와의 영광을 환상으로 보게 됩니다. 큰 폭풍(4절), 네 생물(5-14절), 바퀴(15-21절), 궁창(22-25절) 그리고 사람의 모양(26-28절)을 에스겔은 아주 세밀하게 표현합니다. 하지만 그 세밀함이 오히려 하나님 영광을 표현하기에 턱이 없었습니다. 이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앞에서 그것을 세밀하게 기록하던 에스겔은 그 기록을 멈추고 엎드립니다.

10.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 (에스겔 1:28)

에스겔이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서 최종적으로 취한 행동은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그 분을 예배하고, 그 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첫번째 본분입니다. 이로써 에스겔은 자신이 서 있는 시대에, 자신이 처한 바로 그 자리에서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을 위한 선지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에스겔과 함께 하셨던, 그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와도 함께 하시며, 우리가 처한 바로 그 자리에서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동행의 ‘샴’으로 부르시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