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 미니스트리

스가랴 6-10장

제주한교회 2020. 9. 25. 13:18

<말씀을 걷다> 모자이크미니스트리 성경통독, 스가랴 6-10장

1. 스가랴는 어둡고 좌절하고, 낙망하던 시대에 유대백성들에게 부흥사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격려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성전의 건축을 격려하고, 미래의 영광스러운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2. 스가랴 1-6장에서 그는 8개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이제 7-8장은 그로부터 2년뒤인 기원전 520년, 페르시아 왕 다리오가 즉위한 지4년에 하나님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자리’에 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이 어떤 환경, 어느 자리에 임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 종자를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여러 해 동안에 행한 대로 오월간에 울며 재계하리이까 하매”(스가랴 7:2~3)

4. 여기 나오는 벧엘 사람들의 이름인 사례셀, 레겜멜렉은 바벨론식 이름입니다. 이들은 바벨론에서 태어나 바벨론식 이름을 받아서 살다가 스룹바벨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습니다. 귀향한 이들은 벧엘이라는 도시에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질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을 기억하며 금식하는 절기를 지켰는데 4월, 5월, 7월, 10월 이렇게 1년에 총 4번을 금식하였습니다. 4월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을 기억하며 금식하였고, 5월은 성전이 파괴된 것을 기억하며 금식하였고, 7월은 유대인의 학살을 기억하며 금식하였고, 10월은 예루살렘이 포위된 것을 기억하며 금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절기를 계속해서 지켜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질문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것은 참된 부흥의 징조입니다.

5. ‘우리가 지금까지 행해온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우리의 전통이 성경에 맞는 것입니까?’

6. 우리도 이런 질문은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계속하다보면 참된 신앙위에 껴입혀진 종교적 겉옷들을 많이 벗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런 질문은 기뻐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개혁자 마틴 루터나 존 칼빈 같은 분들도 동일한 질문을 하고 성경속에서 그 답을 찾아냈습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부딪치는 환경이나 사건 속에서 말씀으로 대답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스가랴 7-8장에서 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십니다.

7. 스가랴7-8장에서 하나님의 대답이 네 번에 걸쳐서 오는데그 대답이 올 때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이르시되”(스가랴 7:4,8, 8:1, 18)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스가랴 8:18-23은 네번째 대답이며, 벧엘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입니다.

8. 금식의 절기를 1년에4번이나 지킬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에 하나님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금식하는 절기는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진리와 화평이 거하는 온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도성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강대한 나라 백성들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러 찾아온다고 하시면서 유다백성은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단지 금식을 해야 하는가?를 질문했는데 하나님은 위대한 부흥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스가랴의 예언은 오순절의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실현된 약속을 예언한 것입니다.

9.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린도후서 12:10)

10. 성경에는 역설이 많이 등장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등 팔복은 역설의 극치입니다. 역설은 그 역설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약한 것이 실제로는 강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11. 스가랴 1-8장은 환상을 묵시문학의 틀로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9-14장은 시적인 서술문입니다. 성경비평가들은 전반부와 후반부의 저자가 다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볼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우리가 글을 쓰는 방법을 보더라도, 서간문이든, 묵시이든, 시나 수필이든, 글의 목적에 적절한 틀을 선택해서 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것이기에 묵시의 형태로 주시면 묵시로 기록하고 서술형태로 주시면 서술로 기록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12. 스가랴 9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 땅에 임하며”(스가랴 9:1). 그리고 12장에도 비슷한 메세지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스가랴 12:1). 다른 점은 9:1은 경고의 대상이 하드락이고, 21:1은 이스라엘 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 8-14장은 스가랴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하드락과 이스라엘에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여기 ‘경고’는 ‘warning’이 아니라 ‘burden’(부담, 짐)입니다. 스가랴가 이 메세지를 전하는 것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13. 본문에서 ‘하드락’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 땅의 이름은 스가랴 9:1에서 단 한번만 나옵니다. 성서학자들은 하드락 땅을 시리아의 한 도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드락이라는 땅은 성경 다른 곳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있고, 그 땅의 정확한 위치는 아무도 모릅니다.

14. 그런데 AD 4-5세기에 살았던 유명한 한 사람이 ‘하드락’의 정확한 의미를 밝혔습니다. 바로 제롬(Jerome)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분은 성경에 대해 매우 중요한 획을 그은 분입니다. 제롬은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습니다. 제롬이 번역한 성경을 벌게이트(Vulgate)라고 합니다. 제롬이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라틴어는 그 위상이 엄청나게 올라갔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헬라어가 지배적인 언어였는데, 제롬의 ‘벌게이트’가 나오면서 라틴어가 중요한 언어로 부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라틴어가 현재 영어, 독일어, 불어 같은 언어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15. 제롬의 견해에 따르면 ‘하드락’이라는 단어는 스가랴가 만들어 낸 ‘상징적인 언어’라는 것입니다. ‘하드’는 ‘strong’(강한)이란 뜻이고 ‘락’은 ‘weak’(약한)이란 뜻으로 결국 ‘하드락’은 강하면서도 약하다는 뜻을 가진 합성어입니다.
16. 강하면서도 약하고, 강한자는 약해질 것이고, 약한 자는 강해질 것이라.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는 약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강한 분이다.이러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17. 스가랴 9:1-8에는 그 실제적인 예를 말하고 있습니다. 메대 바사의 지배 아래 있던 이스라엘 주변 세 나라가 있는데 시리아(Syria), 페니키아(Phoenicia), 블레셋(Philistine)입니다.

18. 시리아의 중요한 도시는 다메섹과 하맛인데 다메섹은 시리아의 수도이고 하맛은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국경지대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다메섹과 하맛이 지금은 번창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너희를 약하게 만드실 것이고 너희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19. 페니키아는 이스라엘 서북쪽의 지중해에 붙어있는 나라입니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두로와 시돈이라는 유명한 도시국가를 건설했는데 이 사람들이 지중해 해상무역을 장악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넓은 지혜가 있으니 그들에게도 임하리라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보장을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정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은즉 주께서 그를 쫓아내시며 그의 바다 권세를 치시리니 그가 불에 삼키울지라” (슥 9:2~4)

20. 페니키아는 얼마나 놀라운 나라인지 지혜가 많아서 무역을 통해 은을 티끌같이 벌고 정금을 거리에 진흙같이 쌓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로는 자기를 위해 보장을 세웠다고 나와 있는데 큰 요새를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원래 두로가 지중해 연안에 붙어있었는데 침략을 많이 당하니까 지중해 한 가운데 있는 섬을 사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높은 성벽을 쌓고 신두로를 건설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은 배가 없으면 공격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된 것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도 이곳은 멸망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배가 없으니까 육지에서부터 흙으로 길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성벽 앞에다가 성벽보다 더 높게 흙으로 담을 쌓아 공격하여 B.C. 333년에 그곳에 살던 1만 명을 죽이고 3만 명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페니키아는 아프리카 북부에 카르타고라는 도시도 만들었습니다. 카르타고에는 한니발이라는 유명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B.C. 3세기에 일어난 포에니전쟁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게 알프스산을 넘어 로마를 압박했던 유명한 장군입니다. 그런 장군이 있던 나라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망하게 됩니다.

21. 스가랴9:5 이하에는 블레셋 도시들이 나옵니다. 아스글론, 가사, 에글론, 아스돗 이 네 도시들이 항상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도덕적으로 부패시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알렉산더 대왕을 보내 그들에게서 임금을 제하여 버리고 거민들을 사라지게 하고 잡족이 거하는 도시가 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블레셋은 망하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노예로 팔려가고 그 땅에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22. 놀라운 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B.C. 333년에 예루살렘을 침공했겠습니까? 하지 않았겠습니까? 당연히 침공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침공하려 했던 알렉산더 대왕에게 대제사장이 제사장복을 입고 알현한 것입니다. 휘황찬란한 옷을 입은 사람이 자신에게 와서 절을 하며 여호와를 섬기는 대제사장이라고 소개하자 알렉산더가 예루살렘을 그냥 지나갔다고 역사가 요세푸스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약하지만 하나님께서 강하게 해주셨고 메대 바사는 강했지만 약하게 만드셨습니다.

23.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스가랴 9:9)

이제 보이십니까? 스가랴는 메시아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24.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흔들며 옷을 길거리에 깔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가랴 9장의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스가랴 9:10)

25. 당나귀 타고 들어가는 예수님 앞에 칼도 물러가고 병거도 물러가며 활도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 세계적이고 범우주적인 통치를 하십니다.

26. 오늘날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강해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은 약해보입니다. 하지만 참된 진리는 ‘하드락’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적하는 강한 자를 끌어내릴 것이고 당신을 섬기는 약한 자를 높이실 것입니다.

27. 스가랴 9장에 계속되는 말씀은 물없는 구덩이에서 두 배의 축복으로, 10장에는 견고케 하시는 주님, 11장에는 선한 목자를 거절한 댓가, 12장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날, 13장은 목자를 친 칼과 작은 자들에게 드리운 손, 14장은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14장은 내용이 어렵고 난해하고 신비로운 방법으로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신약시대에 이루어질 교회’에 관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스가랴 14:1)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스가랴 14:7)

28. 구약에 예언된 여호와의 날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어로 정관사 ‘the’를 붙여 ‘the day of the Lord’(여호와의 날)로 번역되는 것입니다. 정관사 ‘the’가 붙게 되면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의 날 혹은 심판의 날을 말합니다. 그러나 스가랴 14장에서 말하고 있는 여호와의 날은 “a day of the Lord”로써 “여호와의 ‘한’ 날”입니다. 정관사 ‘the’ 대신 부정관사 ‘a’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7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29. 이것은 어떤 심판의 날이나 재림의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어떤 날’을 말합니다. 이 날은 신약시대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탄생을 예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