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7-30장
Mosaic Ministry, 창세기 27-30장
1. 신앙생활은 아브라함에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 살면서 하나님과 상관없는 문화속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는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믿음없음에서 믿음있음으로 갑니다.
2. 그런데 이삭은 ‘특별’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 야곱, 요셉의 행적에 대해 익숙하지만, ‘이삭’하면 무엇인가 지우개로 지운 흔적같이 희미한 것이 느껴집니다. 이삭은 성경의 인물 중에 가장 난해한 인물 중에 한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그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는 곳보다, 언급이 없는 부분을 짐작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 그에 관한 기록도 막연하며, 불완전하고 많은 의문들을 남깁니다. 마치 실체가 아닌 그림자를 보는 듯합니다. 성경에서 이삭을 언급한 맥락은 길지 않고 몇 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더하여 그러한 맥락이 주는 이삭은 매우 불가사의 합니다. 그가 유별난 행동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자기를 스스로 지우고 있는’ 듯한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두번째의 족장인 이삭의 이야기는 모두 여섯 개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1)이삭의 탄생, 2)이삭의 희생, 3)이삭의 결혼, 4)우물을 파는 행위, 5)이삭과 아비멜렉, 그리고 끝으로 6)두아들인 에서와 야곱에 관한 축복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위의 이야기가 갖는 공통점은 한결같이 이삭이 직접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타의에 의한 사건들 이라는 것입니다. 이삭은 언제나 남들이 행동을 일으켜야 수동적으로 메아리처럼 반응을 나타내는, 참으로 그의 주체를 파악하기가 심히 막연한 인물입니다.
4. 이삭을 계보적으로 짚어 보면,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창세기25:10). 그리고 곧 이어 그가 60세 일 때 쌍둥이 두 아들 야곱과 에서가 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과 관련이 된 이야기는 모두 남들의 행동에 관한 이야기 뿐입니다. 그의 직접적인 행동은 하나 같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행동을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파낸 우물을 다시 파고 있고, 그리고 아버지가 아비멜렉과 바로를 만난 것과 같이 자기도 같은 경험을 되풀이 합니다. 다시 말하여 동일 주제에 대한 약간의 수정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보고나면 이삭의 존재는 후에 12지파의 아버지가 되는 ‘야곱의 아버지’라고 하는 간결한 한 마디가 되고 맙니다.
5. ‘이삭의 아버지는 아브라함’, ‘이삭의 아들은 야곱’, ‘아브라함의 아들은 이삭’, ‘야곱의 아버지는 이삭’ 이것이 이삭의 정체입니다! 놀랍지 않은가? 저는 성경에서 이토록 자기절제에 승리한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이삭의 일생을 한단어로 요약하면 ‘순종’이라는 단어가 뚝 떨어집니다.
6. 히브리서의 기자는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브리서 5:8) 아브라함의 믿음의 절정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그를 데리고 모리아 산에 오르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믿음은, 그때까지 아브라함 자신과 동행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대한 ‘절대신뢰’였습니다. 이 믿음의 자리에 이삭은 묵묵히 아버지 아브라함을 따라 모리아 산에 오릅니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님 처럼. 우리는 이삭을 통해서 ‘십자가’의 그림자를 볼 수 있습니다.
7. 또 한가지 이삭에 대해서 우리가 반드시 상고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삭이 족장의 계보를 이어준 인물이라는 것만이 아닌, 후세의 유대인들이 그를 위대한 신앙의 창시자로 간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삭이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특성을 전제적(前提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가 아브라함이 수립한 전통의 전 중량을 홀로 어깨에 지고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생각을 하고 보면 이삭의 입장은 선망(羨望)보다는 친근한 동정의 대상이 됩니다. 아버지가 너무 위대한 경우에 아들이 겪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여정은 참으로 만만치 않습니다. 그가 좋거나 싫거나 간에 받아들여야 하는 마치 하나의 연결 고리 같은 이음새의 존재라고 하는 이유 하나만이 그에게 넘겨진 상속의 전부인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우는 아브라함의 아들로 태어난 이삭의 자리가 바로 그러한 연결고리였습니다.
8. 후계자의 특권은 드러나 보이지 않는 수고가 그들의 몫이 됩니다. 시작이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나 더 어려운 일은 지속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후계자가 발휘해야하는 실력은 창조자가 발휘하는 역량 이상으로 탁월함을 요구합니다. 창시자는 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1세대의 성취가 순간적인 에피소드로 지나가 버리지 않도록 뿌리를 내리게 하며 더욱 튼튼하게 하는 힘든 일은 바로 후계자의 책임입니다. 창업을 해낸 자가 거인인 경우는 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창업의 거인의 세대가 지난 다음에 그것을 유지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투쟁은 바로 후계자의 몫입니다. 그럼에도 아무도 후계자의 수고를 찬양하여 빛난 업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후계자가 할 일은 창조가 아니라 ‘보존’이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한 수고는 아버지가 전에 발굴한 우물이 흙과 돌로 매몰이 된 것을 다시 파내는 일이고 막힌 샘이 다시 흐르도록 길을 터 청소 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한 일을 아들은 그대로 계속할 뿐이다. 따라서 이삭의 업적은 빛나는 전설이 될 소재가 아니나, 그럼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정당히 평가하자면 아브라함이 위대한 아브라함이 된 이유는 이삭의 수고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제 2세대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9. 진정한 후계자는 자기주장과 자기표현을 절제해야 합니다. 이삭은 후계자로서의 자기 이외의 인물이 되려고 하는 충동을 단호하게 거부한 진정한 후계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구습을 타파한 힘의 상징이 아니라, 물려 받은 것을 보존한 힘의 상징이 됩니다.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거나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는 대신에,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를 고수 한 것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교본이 됩니다.
10. 마지막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가는 다리를 놓겠습니다. 이삭은 야곱이 아닌 에서를 좋아합니다. 자기와 다른 성격의 활발한 에서를 좋아하는 것은 이삭의 편중심리일 것입니다. 에서는 자기 생각대로 과감하게 추진하는 강한 의지력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수렵인이었고, 산과 벌판을 달리며 표적물을 취하는 사람입니다. 천막의 안온한 곳에서 조용히 세월을 보내는 인간형이 아닙니다. 항상 보수적이고 내면적이 갈등을 묻어두고, 순복으로 일관 한 생애를 걸어 온 이삭이 자기에게 없는 이러한 남성적인 성격자인 에서를 사랑 한 것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에서보다 야곱을 선택하게 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속에는 참으로 거대한 하나님의 의지, 곧 인간이 절대로 거역 할 수 없는 힘의 간섭이 있습니다. 야곱의 선택은 어떻게 변경 할 수 없는 지극히 복잡하고 인간의 지혜가 측량할 길이 없는 하나님의 간섭으로, 신적역학(神的力學)에 관한 ‘섭리’입니다. 3세대 야곱. 아~ 이 지렁이 같은 야곱… 과연 야곱은 누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