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걷다, 사사기 13-17장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사사기 13-17장, 사순절 <40일 Salt 3.3 캠페인>
1. 사사 삼손은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위대한 선조의 반열에 오릅니다. 그러나 사사기에서 삼손을 걸으면 한심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으나 모든 것을 허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출생 기록이 있는 사람은 모세, 야곱, 세례 요한, 예수님 그리고 삼손입니다. 그것도 아주 긴 출생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사사기 13장 전체).
2. 삼손은 그 이름대로 ‘강한 자’입니다. 그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도록 강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세 구분되는데, 딥나의 여인, 가사의 기생, 그리고 들릴라에 묶여서 망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소중한 가치인 정체성과 책임과는 상관없이 산 사람이 삼손입니다. 그런 삼손이 왜 성경에 기록되었는지, 조금 더 생각하면 왜 이런 식으로 기록 되었는지를 찾아내야 합니다.
3. 이 문제는 심오하지 않습니다. 의외로 쉽게 풀립니다. 다만 한가지 조건은 우리 자신을 정직하고 냉철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 번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오.
“내가 삼손입니다!”
4. 기분이 별로 신 가요? 삼손은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자기 인생을 망친 사람입니다. 우리보다 못한 사람, 우리보다 더 간 사람들이 성경 안에 들어왔다면 우리는 희망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 말도 안되는 인생을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올리셨습니다. 삼손이 한심한 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더 큰 것입니다. 삼손의 못난 것을 비난 하는 자리에 서있는 우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5.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정말요?’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니 우선 내 이빨을 좀 건강하게 해주세요. 맛있는거 있어도 못먹겠어요.’라고 구합니다. ‘그래 튼튼한 이빨을 주마!’ 그러면 우리는 ‘이빨만 튼튼하면 뭐해요. 맛있는 걸 주셔야죠.’ 그렇게 끊임없이 갑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은 우리가 소원하는 것들이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 삼손을 닮았습니다.
6. 사사기는 21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그 생애가 길게 소개된 사람들을 대사사라고 합니다. 드보라, 입다, 삼손… 그 중에서도 삼손이 제일 깁니다. 무려 네 장에 걸쳐서 그의 생애가 소개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한심합니다. 처음에 딥나에 내려가서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며 난리를 벌입니다. 그리고 가사의 기생에게 갔다가 난리를 치고, 세번째는 그 유명한 들릴라에게 걸려서 머리를 깍이고 두 눈을 뽑히고, 노예가 되어서 블레셋의 축제날에 불려 나와 재주를 부릴 때 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가 축제장의 두 기둥을 붙잡아 쓰러뜨려서 지붕에 있는 사람만 삼천 명을 죽입니다. 이 막판에 와서 우리는 통쾌 하면서 유쾌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7. 그러면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하나님 삼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입니까?’ 그러면 성경은 똑같이 ‘그래 너희는 무엇이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우리가 질문한 것을 받아서, 다시 성경이 우리에게 하는 질문을 찾아가야 합니다. 삼손은 자기 인생에서 자기가 죽어버리면 끝나는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삼손은 아무와도 관계의 책임을 가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의 죽음에서 드러나는 허무한 인생입니다. 자기 하나 죽으면 그만인 인생, 죽음 마저도 보복으로 끝나는 인생이 삼손입니다.
8. 그러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삼손과 달라집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4-7)
이 내용은 추상적이지 않고 관계적 입니다. 서로 묶여 있는 겁니다. 이것이 삼손과 다릅니다. 죽어버리면 끝나는 삼손이 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못합니다. 그래서 협박하죠. ‘나 죽어 버릴꺼야!’ 무슨 뜻입니까? ‘너 당해봐라!’ 아닙니까? 삼손이 ‘나 죽어버릴꺼야!’ 하면 뭐라고 합니까? ‘그래 죽어!’ 입니다. 이게 다릅니다.
9. “내가 확신 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이것이 ‘관계있음’입니다. 예수님 께서 우리의 운명과 선택에 당신을 묶으신 것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소원합니까?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살고 싶다… 헐… 그런 식의 발상이 바로 삼손입니다. 내가 어머니이기 때문에… 내가 자녀이기 때문에… 내가 최후의 일인이기 때문에… 할 수 밖에 없는 그 일들이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조건인 것입니다.
10. 이렇게 삼손의 생애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대조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 현실, 조건은 신비합니다. 도망칠 곳이 없는 그 자리에서 담아내야 할 것들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이것을 담기 위해 주님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