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사사기 18-21장

제주한교회 2020. 4. 9. 11:41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사사기 18-21장, 사순절 <40일 Salt 3.3 캠페인>

1.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한 레위인이 이런저런 사연으로 처가에 가있는 첩을 데리러 갔습니다. 그가 처와 함께 돌아오는 길에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라는 곳에서 사건이 일어납니다. 밤이 깊어서 그 동네에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그 밤에 동네사람들이 와서 능욕을 하려 합니다. 유숙하던 집 주인이 말리다가 자기의 딸을 내어주겠다고 하는데도 레위인의 첩을 데려가 못된 짓을 합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첩이 밖에서 죽어있는 것을 본 레위인은 너무나 분노한 나머지 여인을 열두토막으로 잘라서 이스라엘의 각지파에 보냈습니다. 그 시체를 본 지파들이 분노하여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시작하고, 베냐민 지파와의 혼인을 금지합니다. 그래서 후에 베냐민 지파의 남자가 600명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2. 남은 600명이 산속에 들어가 도피생활을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민에 빠집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지파가 끊어졌도다”(사사기 21:6)하며 이스라엘이 고민하다가 그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딸을 주지 않겠다는 맹세에 참여하지 않은)을 찾습니다. 그 사람들은 길르앗 야베스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가서 거룩한 성전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딸 400명을 데려와서 베냐민지파의 남은 600명의 아내로 줍니다. 그런데도 200명이 모자라서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에게 ‘해마다 실로에 축제가 벌어질 때 너희들이 와서 아내를 약탈해가라, 우리가 줄 수는 없지만 훔쳐가는 것은 눈감아 주겠다’고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3. 눈여겨 볼 장면은 이 사건의 처음과 끝이 같은 말로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때에…”(사사기 19:1a)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사사기21:25a)입니다. 이 사건의 시작과 끝은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가지 마음대로 행했다고 정리합니다. 왕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정치 체제가 왕정이라는 형태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8장에 가보면 이 문제가 설명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을 달라는 요구에 대해서 하나님의 답변이 나와있습니다.

4.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사무엘상 8:7) 이스라엘 민족의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나라인데 하나님이 왕노릇을 할 수 없었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마지막 부분의 메세지입니다.

5. 사사기에서 계속 반복되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는 그들에게 왕이 없었다는 문자적 뜻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6. 이제 사사기의 마지막에 기록된 잔인한 사건을 조금씩 이해하다보면 무서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이해하기에 매우 난해한 사사기 마지막의 사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들에게 왕이 없었다’는 것은 그들이 왕이신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분명히 그들은 전쟁을 할때나 결정을 할 때 하나님께 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때는 그들이 하나님과 관계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왕이 없었습니다.

7. 신앙생활을 하면서 드리는 기도나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예식이 하나님과 관계없을 수 있습니다. 예배당에 평생다녀도 하나님과 관계 없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종교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종교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경은 사실을 왜곡시키는 것을 다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거짓말 한 사람에 대해서 오히려 칭찬한 구절도 있습니다.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 스파이를 감추어 주고 거짓말했지만 하나님께 축복받았습니다. 모세가 태어날 때 산파들도 거짓말했지만 축복받았습니다. 왜 일까요? 하나님 편에 선 거짓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거짓말을 절대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절대기준입니다.

8. 레위인의 첩에 대한 잔인한 사건에 대하여 레위인이 고소가 등장합니다. “내가 내 첩의 시체를 거두어 쪼개서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냈나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다 여기에 있은즉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 지니라 하니라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이르되 우리가 한 사람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며 한사람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우리가 이제 기브아 사람들에게 이렇게 행하리니 곧 제비를 뽑아서 그들을 치되”(사사기 20:7-9) 이 말씀은 그 의미를 조금씩 파헤져 보아야 합니다. 베냐민 지파가 레위인의 첩에 대해서 행한 일에 대해서 그들은 하나님께 물어서 전쟁을 합니다.

9. 이 장면을 주의깊에 보면 우선 레위인이 자기가 당한 일에 대하여 첩의 시신을 열두토막 낸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이스라엘 각 지파는 레위인이 시신을 열두토막 낸 것에 대하여 일언반구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장면을 먹고 걸으면서 당연히 ‘이럴수가’하는 장면임에도 그 원사건의 당사자들은 왜 그리했느냐고 질문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행간이 어떤 메세지를 꺼내놓고 있는가? 바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사는 인간의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0. 이스라엘 지파들은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했습니다. 그 결과 베냐민 지파 남자 600명만 남게 되었습니다. 지들이 죽여놓고 베냐민 지파가 멸절될까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길르앗 야베스 여인 400백을 아내로 줍니다. 나머지 200은 실로의 축제 때 눈감아 줄테니 약탈해 가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사기의 마지막 부분은 먹고 걸으면서 말도 안되는 사건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도안됨’이 메세지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는 ‘짓’이 그들의 가치관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사기 마지막의 사건을 묵묵히 기록하시면서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어떠냐?

사사기는 우리가 기대하는 결론을 내지 않고 그럴 듯한 교훈을 남기는 것 같지도 않게 끝이 납니다. 사사기 마지막장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