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목사 메세지

가룟유다의 양면성

제주한교회 2021. 1. 2. 23:28

마태복음 26장 14-16절, 요한복음 13장 1-6절, 로마서 7장 21-24절

1. 교회를 다녀본 적이 있던 분들은 대부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예수님을 배신한 열두 제자 중의 하나 ‘가룟 유다’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이 유다에 대해서 기독교계에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2. 첫 번째 견해가룟유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완성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저주받는 역할을 자청한 안타까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독립군인 열심당원이었던 가룟유다는 민족주의자로 누구보다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희망하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정말로 예수님을 팔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능력을 가지고도 로마를 향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자 능력을 발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일부러 이끌어 갔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에는 가룟유다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3. 두 번째 견해는 가룟유다는 돈을 사랑한 자였기에 노예를 거래하는 돈, 겨우 은 삼십에 자신의 스승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준 돈에 눈이 먼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6절에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고 기록된 것에 의해 이미 그 전부터 가룟유다는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 견해입니다.

4. 가룟유다라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 혹은 스승을 돈에 넘겨준 배신자라는 한가지로 정의 될 수 없습니다. 그가 속했던 열심당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단체였습니다. 그는 정말로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자였던 것도 맞고, 돈의 유혹에 약한 사람이었던 것도 맞습니다.
그는 정말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로 예수님을 따랐으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나님 나라를 바라라’ 같은 현재의 상황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말을 하는 것을 넘어 로마로부터 독립이 아닌 죽어야 하겠다는 말을 전하자 실망하게 되고 그 실망감이 원망으로, 증오로, 분노로 발전했을 것입니다.

5. 이러한 유다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어떤 선한 마음도 분명히 가지지만 마음 한 구석에 악한 마음도 있습니다. 신약의 대부분을 기록한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사도바울도 내면에 통제되지 않는 자신의 죄성과 끊임없이 싸워왔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고 우리의 본질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가까이 가려고 하면서 멀어지려하는 모순된 양면성입니다.

6. 가룟유다는 안타까운 사람, 배신자라고 정의하기보다 “마음을 빼앗긴 사람”입니다(요13:2).

그는 사단의 유혹에 맞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잠언 4장 23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을 지키는 것은 바로 그 마음을 거룩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빈틈을 우는 사자처럼 우리 주변을 두루다니며 삼킬만한 자를 찾습니다.(벧전 5:8)

7. 모든 사람은 자신의 그 양면성안에서 내적 갈등을 겪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일주일에 한번 예배를 드리고 나머지 6일을 세상 속에서 갈등이 없다면 내 안에 정말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가 하고 심각하게 나의 영적인 상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갈등 안에서 영혼을 지키는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마음을 조율해야 합니다.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공연자들은 시작 전에 자신의 악기를 다시한번 조율합니다. 그들이 조율하지 않고 온 것이 아니라 공연 전에 다시 한 번 자신의 악기를 세밀하게 조율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처럼 계속 점검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스치는 생각들로부터 내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8.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말하자 제자들이 근심하며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묻습니다. “주여 나는 아니지요? 주여 내니이까?” 제자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자신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그 잣대를 자신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교회안에서 남을 돌보고 가르치는 사람들 목사, 전도사, 교사, 셀리더, 각 기관의 대표들은 남에게 교육하고 남을 지적만하다가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돌아보지 못해 타락하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종교혁명을 일으켰던 루터는 마음을 지키는 일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새가 내 머리 위를 나는 것을 어떻게 할 수는 없으나, 그 새가 내 머리에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할 수는 있다.” 악한 생각이 내 마음에 자리 잡게 하면 안됩니다.

9. 마음을 빼앗긴 유다의 모습을 보면 2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외형적으로 전혀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이고 돈궤를 맡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함께 먹고 마시고 나누고 그 기적의 현장에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마음을 빼앗기고도 설교하고 찬양인도하고 성경공부하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아닌 우리의 마음을 확인하지 않으면 가룟유다처럼 완전히 빼앗기는 단계가 됩니다.

또 다른 하나는 바로 가장 연약한 것으로 사단이 파고 든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돈에 약한 사람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연약함을 스스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부분을 조심해야 합니다.

10.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아서? 회개하지 않아서? 지옥에 갔을거다라고 행위론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변명이 많아지고 동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처음부터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드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의 사역을 판단하고 돈의 욕심에서 자신을 지키지 않아 예수님에게 온전히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한 3년 반의 시간이 그 소속을 정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신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죽이는 일에 앞장서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다시 돌아와 회개하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께 속하지 않았기에 자신의 양심에 호소하다가 자살이라는 비극을 선택합니다.

11. 우리의 신앙생활은 가룟유다처럼 하나님과 관계없이 흘러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선한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C.S 루이스는 이러한 사람은 확실하게 하나님이 아닌 악마를 따르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 안에 선과 악이 있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내 마음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내면의 영적전쟁을 통해 내 마음을 돌아보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성도의 삶입니다.

 오늘 설교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얼마나 교회를 다녔는지 얼마나 열심히 다녔는지가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대면예배를 강행하는 것이 믿음이다라는 분들도 꽤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 행위로써 구원받지 않는다는 것을 눈으로 보았으나 마음으로 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