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목사 메세지/성경 속 조연들

성경 속 조연 #2 셈, 함, 야벳(노아의 아들)

제주한교회 2020. 1. 20. 10:35

성경 속 조연 이야기 두번째는 노아의 아들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작은 아들 '함'에 대해서 나눠보려고 합니다.

'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노아'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고 넘어갈까요?

하나님은 가인에게 죽은 아벨 대신에 아담과 하와에게 새로운 씨인 '셋'을 주십니다.

1. 셋의 후손(하나님의 아들들)과 가인의 후손(사람의 딸들)

그리고 그 셋의 후손들이 점점 번성하게 되는데 처음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던 그 셋의 후손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가인의 후손들 성경에서는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을 아내로 삼아 가인의 후손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점점 타락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그리고 이 세상의 사람들은 점점 타락하고 생각하는 것이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심을 한탄하고 벌을 내리시기로 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6:5-7)

 

 2. 에녹과 므두셀라

그런 시대에 셋의 후손중에서 에녹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죠.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는데 이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이 심판을 막는 자입니다. 그 므두셀라를 낳은 후부터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365세를 살고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2-24)

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마지막 때에 에녹과 같은 성도들이 있는데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들리움'을 받을 성도들을 나타냅니다.

그 다음에는 므두셀라와 같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세에 라멕을 낳았으며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 이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 구세를 향유하고 죽었더라"(창5:25-27)

자, 이제 수학이 필요합니다. 므두셀라는 몇 세에 아들 라멕을 낳았을까요? 187세입니다. 라멕은 몇 세에 노아를 낳았습니까? 182세입니다. 그리고 노아가 몇  세에 홍수가 일어났을까요? 600세입니다. 187+182+600=969 므두셀라의 년수가 나옵니다. 

므두셀라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마지막 때가 다가옴을 경고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므두셀라가 죽자마자 노아의 홍수가 이 땅에 임했습니다. 

 

3. 노아와 홍수

이제 노아입니다. 노아가 500세가 된 이후에 셈, 함, 야벳을 낳고 100년후에 홍수가 임하고 노아와 노아의 가족은 방주안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마지막 때에 노아와 같은 성도는 환란을 거치며 구원을 받는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성경은 노아를 은혜를 입은 사람이고, 당대의 완전한 자 의인이며, 하나님과 동행한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노아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홍수가 일어나기 전까지 일상생활을 살아갑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태복음 24:37-39)

마지막 때에 사람들은 사고 팔고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특별한 일이 아닌 일상생활을 살아갑니다. 무엇인 문제인가 하면 그들은 홍수가 임할때까지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왔는데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6:31-32)

홍수가 임하던 노아의 때, 사람들의 모습은 
1) 죄악의 관영하고
2) 일상생활의 재미에 취해 산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도 보면 노아의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일상 가운데 하늘에서 물이 떨어집니다. 떨어지다 못해 쏟아집니다. 홍수가 이땅에 임하고 노아와 그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사라졌습니다.

 

4. 노아의 아들들

여기까지 오는데 서론이 길었습니다. 드디어 노아의 아들들이 등장합니다. 노아의 아들은 세명인 첫째는 셈이고, 둘째는 함이고, 셋째는 야벳입니다. 이 세 아들은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홍수를 듣고 난 이후 100년동안 태어난 자식들입니다. 아버지 노아가 방주를 짓는 것은 보고 함께 하고 방주에 함께 올라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어 농사를 짓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농사지은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는 것을 넘어서 취하여 자기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인사불성이 됩니다.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창9:20-21)

이 모습을 보면서 다시금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떠오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이후 사람은 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깨닫고 부끄러워합니다. 그리고 벌거벗는 것은 사람의 수치를 나타냅니다. 의인이고 하나님과 동행하여 방주에 올라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노아의 벌거벗음을 통해 사라지지 않는 사람의 죄가 다시금 드러난 것입니다.

잠시 술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성경속에서는 술을 마시지 말라는 직접적인 말씀이 아니라 술에 취해 수치를 당하고 실수를 하고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술로 인해 부끄럼을 당하는 첫 인물은 노아입니다.

 

5. 노아의 수치를 아들들이 보다

포도주를 마시고 술에 취해 벌거벗은 노아를 둘째 아들 함이 목격합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나머지 두 형제들에게 아버지의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알립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노아와 함께 구원받은 함에게 있어서 노아의 벌거벗음은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형제들아 저것보아라. 의인이라던 아버지 노아보다 우리가 낫지 않느냐?"

사람들은 남보다 잘낫음을 느끼고 싶어합니다. 남의 잘못이나 실수를 보면서 위안을 얻습니다. 저 살사는 사람도, 잘나가는 대단한 사람도 다 거기서 거기다. 잘난 사람이 나보다 낫지 않음을 보고 싶어하면서 정작 본인은 남보다 조금이라도 잘나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장기하라는 가수의 '별일없이 산다'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를 보면 참 재밌으면서 철학적입니다. 

 

<나는 별일없이 산다>

니가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거다
뭐냐하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니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를 들려주마
오늘 밤 절대로 두다리 쭉뻗고 잠들진 못할거다
그게 뭐냐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이번건 니가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을거다
그것만은 사실이 아니길 엄청 바랄거다
하지만
나는 사는게 재밌다 하루하루 즐거웁다
나는 사는게 재밌다 매일매일 신난다

나는 사는게 재밌다 하루하루 즐거웁다
나는 사는게 재밌다 매일매일 신난다
좋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나는 사는게 재밌다 나는 사는게 재밌다
매일매일 하루하루 아주그냥

사람들은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는 말처럼 나쁜일은 얼마든지 함께 슬퍼할 수 있으나 좋은 일을 내 일처럼 축하해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6. 함과 다른 아들들의 모습

노아의 취하고 벌거벗은 모습이 노아의 실수가 맞습니다. 그러나 함이 노아의 허물을 드러내고 놀리고 들추는 것은 노아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함의 악한 모습일뿐입니다. 남보다 잘남을 드러내고 싶은 교만하고 악한 모습일뿐입니다.  

함의 모습과는 다르게 나머지 형제 셈과 야벳은 아버지 노아의 부끄러움을 보지 않습니다. 조용히 담요를 가지고 뒷걸음으로 장막에 들어가 노아를 덮어주고 나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실수를 보면서 자신의 잘남을 나타내지 않고 조용합니다. 남에게 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닮아야할 모습입니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창 9:23) 

 

7. 함과 가나안이 저주를 받다.

술이 깬 노아는 이 일련의 사실들을 듣고는 작은 아들에게 저주를 합니다. 그리고 셈과 야벳을 축복합니다. 이 말씀을 볼때마다 너무한 것이 아닐까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긴 시간을 가지고 보면 뭔가 이상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함과 그의 자식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셈을 섬길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다릅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창9:26-27)

창세기 10장부터 나오는 노아의 아들들의 족보를 보면 함의 아들들 가나안, 구스, 붓, 미스라임의 후손들은 큰 나라를 이룹니다. 가나안의 자녀 시돈으로부터 여부스, 아모리, 기르가스, 히위 족속이 나오고 다른 아들 헷으로부터 히타이트 족속이 나오고, 함의 다른 아들 구스로부터 첫용사 니므롯이 등장하고 그의 후손은 앗수르와 바벨을 세우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함의 또다른 아들 미스라임으로부터 이집트와 블레셋(가슬루힘)이 등장합니다. 이 나라들은 역사적으로도 강대한 힘을 가진 나라들입니다. 

* 함-가나안-시돈-여부스,아모리,기르가스,히위,알가,신
* 함-가나안-헷-히타이트 문명
* 함-구스-니므롯(메소포타미아문명)-앗수르, 바벨(시날땅, 바벨탑)
* 함-미스라임-이집트, 가슬루힘(블레셋)

 

8. 셈의 후손들 

반면에 셈의 자손들을 보면 함의 후손보다는 큰 나라를 이루지는 못합니다. 야벳의 자손보다도 더 작은 세력을 가지는 것이 셈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노아는 분명히 셈의 후손을 축복하고 가나안이 셈의 종이 된다고 하지만 셈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함의 후손에게 지배를 받고 괴롭힘을 당한다는 사실이 성경속에서 정말 많이 등장합니다.

* 셈-아르박삭-셀라-에벨-벨렉-르우-스룩-나홀-데라-아브라함-이삭-야곱-이스라엘-다윗-예수그리스도
* 셈-아르박삿-셀라-에벨-욕단-아라비아-두로
* 셈-엘람-페르시아-이란

노아의 아들들의 족보를 따지자면 너무나 긴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앞으로 하나씩 하나씩 등장할때마다 보도록 합시다.

셈의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 이스라엘이 나오고 그 이스라엘에서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게 된다는 것을 본다면 셈의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온 세상을 축복하심을 우리는이미 알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성경속에 가장 악한 왕의 대명사는 아합왕입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악한 왕의 대명사는 헤롯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합과 헤롯의 시기에 다른 왕들과 다르게 지중해 쪽으로 눈을 돌려 바라본 현명했던 왕입니다.

아합은 시돈과 사돈을 맺어 나라가 부강해지고, 헤롯은 지중해를 넘어 헬라와 로마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고 황무지였던 가이사랴 빌립보를 건설하여 유대와 로마를 다 만족하시고 강성하게 이끈 정치적으로 대단한 왕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은 자들이었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던 하나님의 시선에서 악한 왕들입니다.

 

9. 하나님 안에 거하는 거룩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의 복은 부유하고 강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고 그의 인도하심 안에 거하는 것이 바로 복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남보다 잘나음이 아니라 거룩함입니다. 남의 실수를 들추고 짓밟고 자신이 올라가는 것은 세상의 방법입니다.   

 종종 목회자들의 타락하고 부정한 모습들이 뉴스를 통해 듣고 창피를 당하는 사실을 들을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너도나도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신학생, 전도사, 목사 사역을 한다는 사람들은 자신의 SNS를 통해 그 사람들을 비난하고 깍아내리는 글을 올리는 것을 보면서 함의 모습이 엿보입니다.

어느 하나 셈처럼 그 부끄러움을 덮어주고 사랑으로 기도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 유명했던 거룩한 척 했던 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

하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그 사실을 모르던 사람에게까지 그 허물을 전하고 들추는 것을 보면 조금도 그리스도인의 거룩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없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하는 그 사람의 잘못은 그의 잘못이지만, 그 허물을 남에게 전하는 것은 그의 잘못과 상관없는 전하는 자의 죄악입니다. 

우리는 그런 잘못을 보면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생각만 해서는 부족합니다. 구체적인 대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비슷한 상황이라면 별 다르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들추고 남에게 전하고 싶을 때마다 노아의 아들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함의 모습이 아니라 셈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는 하나님이 쓰시는 자, 거룩한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