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4장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사무엘하 1-4장, 사순절 <40일 Salt 3.3 캠페인>
1. 사무엘상 24장에는 엔게디 광야에서 있었던 사건이 나옵니다. 다윗은 굴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지만, 죽이지 않고 옷자락을 벱니다. 다윗이 나중에 사울에서 멀리 떨어져서 이 이야기를 하자 사울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네가 나를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네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하니라.”(사무엘상 24:16-21)
잘 보십시오. 사울은 다윗의 승리와 운명을 알고 있습니다. 그 때가 되었을 때 자기 자손을 부디 은혜로 대해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망할 것을 알고 있다면 왜 회개하지 않을까? 이것이 당연한 생각입니다. 이 문제를 어제 잠시 다루었습니다.
2. 이 말씀이 가르치고 싶은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울은 회개를 거절하기를 선택했고, 다윗은 순종을 선택한 사람으로 성경은 두 사람을 대조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함으로 순종을 거부한 자의 몰락이 아니라, 은혜를 거부한 자,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것을 거부한 자로 그려집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울은 믿지 않고 다윗은 믿었다.’는 얘기는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이야기는 순종을 거부해서 죽는 것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잇대어 있지 않으면 그가 가진 모든 최선, 그리고 현실이 다 말라 죽는 것이 되고 만다고 얘기합니다. 반대로 다윗은 항상 하나님과 잇대어 있어서 그분으로부터 지혜, 생명, 은혜를 공급받습니다.
3. 그러므로 다윗과 사울을 걸을 때는 사울은 못났고, 다윗은 잘났고로 가면 안되고, 상기한 내용을 근본으로 두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들이 각각 다른 반응의 근본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께 잇대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다름이라는 거지요.
4. 바로 이 ‘다름’에 대한 사건으로 사무엘하가 시작됩니다. 바로 사울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반응입니다. 다윗은 경쟁자를 꺽음으로 얻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만일 다윗에게 왕권은 사울과의 경쟁에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꺽음으로 왕권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게 다릅니다.
5. 한 걸음 더 나가서, 다윗에게 왕권은 권력이 아닙니다. 그에게 왕권은 ‘왕다움’입니다. 성이 왕씨고 이름이 다움이 아니라, 왕의 격(class)입니다. 그 그릇에 수준을 담아내는 것입니다.
6. 우리는 ‘예수님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예수천당, 안 믿으면 지옥’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진리의 한 면 이기는 하지만, 이것을 배타적 이분법으로 생각하면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구원받을 다른 이름은 없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결국 사망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다.’는 선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힘도, 능력도, 재물도 영원에 잇대어 있지 못합니다. 또한 예수님 없이 살면, 생명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7. 우리가 잘 아는 구절을 인용해 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 3:16)
하나님이 예수님을 왜 보내셨습니까? 편 가르라고? 비판하라고? 정죄하라고? 아닙니다. ‘영생을 얻게 하려고, 구원 받게 하려고’ 입니다.
8.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에서 다윗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 있음’의 삶이 다윗의 삶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다윗이라고 하면서, 세상의 사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건 다윗이 아니라 사울 입니다.
다윗에게는 은혜가 담깁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누구를 쳐서, 정죄해서, 꺽어서 자신을 증명하면 사울입니다. 이 말씀을 곰곰히 음미하며 걸어보십시오.
9. “사도들이 놓이며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사도행전 4:23-26)
사도들이 기적을 일으키고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다가 붙잡혀 갔다가 풀려나서 무엇을 확인합니까? 하나님이 대주재시라고 하며 창조주라고 고백하며, 반대하는 세력을 허락하신 분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이렇게 이어집니다.
10.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부르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사도행전 4:27-28)
저 악당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거슬러 자기 역할을 하려고 모였다는 얘깁니다. 바로 여기서! 그 다음에 뭐가 나와야 할까요? 지금 교회들은 그들을 멸하여 주옵소서! 라고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다음절을 보십시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사도행전 4:29-30)
바로 이게 다윗입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 있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와 회복을 통한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리는 자로 세상에 사는 것입니다. 이제 사무엘하 1장 17-27을 걸어보십시오. 거기에 <사울과 요나단을 위한 다윗의 조가>가 나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