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3-16장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사무엘하 13-16장, 고난주간
1. 사무엘하 13장에는 암논이 다윗의 딸 다말을 욕보이는 이야기가 나오고, 이어서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이 복수를 해서 암논을 죽이고 도망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14장에 들어서면, 드고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건들이 전부 밧세바 사건에서 연결된 것들입니다.
2. 밧세바 사건으로 인해서 다윗은 명예가 실추되고 민망함 가운데 있는데, 암논이 사고를 칩니다. 이복여동생을 겁간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다윗이 할 말이 없습니다.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앙심을 먹고 있다가 암논을 죽입니다. 그리고 도망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과정에서 끼어들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정황에서 발언권이 없습니다. 그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정의가 실현되려면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죽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권은 영원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3. 밧세바 사건 이전의 다윗은 참 잘났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거꾸로 망신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면 그나마 나을 텐데, 그는 드러난 사람이요, 왕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최고의 성군이었습니다. 그런데 밧세바 사건으로 그는 ‘할말 없음’이 된 것입니다. 이제 그에게는 입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14장에 오면 요압이 드고아 여인을 보냅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과부입니다. 남편이 없고, 아들 둘이 있는데, 둘이 싸우다가 형이 둘째를 죽였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동생을 죽인 형을 죽이겠다고 내어놓으라고 합니다. 둘 다 죽어버리면, 우리 가문의 대가 끊기고, 나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려주십시오.’라고 합니다.
4. 다윗이 들어보니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살려주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못죽이게 해주겠다는 겁니다. 그러자 여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왕은 압살롬을 왜 살려주지 않습니까?’
이 장면을 잘 구성해야 합니다. 왕이 압살롬을 살려주면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지금 한 여인이 다윗에게 와서 법을 어긴 용서에 대해서 충고하는 것입니다. 나단이 와서 ‘너는 죄인이다.’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한 상태에 와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다윗이 이 여인에게 끌려가는 겁니다.
5. 성경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물리친 때보다, 그가 ‘아무 할 말이 없음’에서, 그 자리에서 용서를 위해서 마음을 여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놓치면 안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은혜의 담지자(擔持者)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드러내는 분수령이 밧세바 사건인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이런 뜻이 됩니다.
밧세바 사건 이전의 다윗은 신앙심에서 영웅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밧세바 사건으로 인해서 그 앞에 있던 모든 자랑스러움과 영웅적인 요소들이 다 부서집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서 다윗의 실수, 영웅도 실수한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날이 있다고 해석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성경이 의도한 바가 아닙니다. 성경은 ‘다윗이 그 앞에서 가졌던 것들을 신앙의 모범으로 여기지 말라.’는 메세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6. 이 메세지의 실마리가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고 한 데서 드러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골리앗을 무너뜨렸습니다. 사울이 죽이려고 추적할 때 도망 다니면서 복수의 기회를 가졌음에도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통해 합니다. 이런 다윗의 잘난 것들의 정점이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겠다고 하는 자리에 까지 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거기서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내 필요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건방지구나! 네가 나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이다!’이렇게 가는 겁니다. 그리고 밧세바 입니다.
7. 바로 이것이 신앙생활의 싸움입니다. 신앙생활은 인간의 최선의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 만이 만들어 내실 수 있는 것에 너희의 지위와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지위는 세상에 있는 왕권이 아닙니다. 오히려 쪽팔림에 가깝습니다. 거기에 은혜가 담깁니다. 이 자리가 세상에서 우리의 자리입니다.
왕권을 가지고, 왕의 대로로, 어쩌구 저쩌구 세상을 호령하고 통치해라!는 말처럼 유치한 것도 드뭅니다. 이것은 지극한 교만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담은 자입니다. 할 말이 없어진 자입니다. 입이 있어도 없음이 된 자입니다.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가 다윗에게는 밧세바 사건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다윗은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가 됩니다. 다윗의 영광은 거기서 죽고 사라지며, 하나님의 은혜만 남습니다.
8. 다윗의 전반기 생애는 고난도 흠모할 만하게 멋집니다. 거기에서 암놈이라는 놈이 이복여동생을 겁탈합니다. 다윗은 분노하지만 아무 말도 못하게 됩니다. 후반전에 와서 다윗은 면목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아들에게 까지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이 문제를 풀어내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제자리만 돌게 됩니다.
많은 신자들이 회개해서 능력 받고 세상에 큰소리를 치고 싶어합니다. 오해한 겁니다. 그럴 수록 하나님은 우리를 부끄러운 자리로 몰고 가실 것입니다. ‘너희가 기도한다고 하는데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냐?’라는 소리를 듣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지금 떡 여기서 멈추어 있습니다. 이 문제가 어떻게 풀릴까요? 이사야 53장으로 가서 봅니다.
9.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1-3)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생각했습니까? ‘그가 무슨 메시야냐? 그가 무슨 하나님이냐? 그가 어떻게 구원을 베푸느냐? 요셉의 아들이요, 나사렛 사람이요, 그냥 평범하기 짝이 없는데!’ 라고 얘기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를 이렇게 해석해 봅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대한민국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라고 얘기하면 세상사람들이 뭐라 그랬다구요? ‘야, 그런 웃기는 소리가 어디 있냐? 너나 잘해라!” 그런 다구요.
모르는 분들을 만나서 소개를 하면 재미있는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저보고 ‘어디서 목회하냐?’고 물어봅니다. 그리고 교인이 몇명이냐고 물어봅니다. ‘정릉에 교회가 있는데, 50년된 다 쓰러져 가는 벽돌 건물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많이 오면 무너질지도 몰라요.’ 그러면 더 이상 안 물어 봅니다. 이 재미는 오이가족들만 아는 재미일 것입니다.
10. 성경에도 똑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 이사야를 보십시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사야 53:2)
이 모습이 딱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바로 여기가 하나님이 담기는 곳이라는 겁니다. 저쪽에 있을 때는, 내가 날뛰던 때이고, 이곳이 은혜가 담기는 곳입니다. 그러면 이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 이야기가 다윗의 후반전입니다.
이제 다윗은 할 말이 없는 사람으로 삽니다. 왕이기에 사람들이 앞에서는 절을 해도 뒤에서는 뭐라고 한마디씩 할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만드시는 사람이 됩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 됩니까? 반역한 압살롬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는 져도 좋은 사람이 되고, 죽어도 되는 사람이 됩니다. 큰소리 치러 나가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됩니다. 그는 죽을 수 있고, 수치를 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과 가장 닮은 모습들 아닙니까? ‘이 시대의 임마누엘’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목적하신 하나님의 부르심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