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 미니스트리

사무엘하 21-24장

제주한교회 2020. 4. 10. 09:33

2020년 4월 10일(금)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사무엘하 21-24장, 성금요일

1. 2017년에 주님의 품에 안기신 로버트 스푸로울(Robert Charles Sproul)목사님은 테네시주 네쉬빌에서 열린 집회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반면에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님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비중을 두고 강조를 하셨던 목사님입니다. 이 주제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논쟁입니다. 오늘 서두에 이 두 분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논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니라, 거기 네쉬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2. 집회가 끝난 후에 스푸로울 목사님에게 이런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천국에 갔을 때, 거기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을 만나게 될 것 같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스푸로울 목사님은 “아니오 천국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을 만나지 못할 것 같네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모두의 얼굴에 충격이 깃들며 장내가 쥐죽은 듯이 고요해 졌습니다. 스프로울 목사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하나님 보좌에 너무 가까이 계시고, 저는 너무 멀리 있어서 그분을 멀찍이서 보기만 해도 감사할 뿐입니다.”

3. 이 말이 어떤 뜻을 품었는지에 대한 토를 달지는 않겠습니다. 천국의 변방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해도 좋습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 잘난척하는 나를 한번 이겨보고 싶습니다.

올 해(2020년) 사무엘서를 걸으면서 전반부에는 다윗과 사울의 정체를 통해서 걸었고, 후반부에서는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연결되는 다윗의 후반부 인생을 걸었습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걷다를 통해서 때로 길게 느껴지는 기록들이, 사실은 훨씬 더 많은 것을 품고 있습니다. 매일 4장씩 걸어가기 때문에 자세히 다루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오늘 사무엘서를 마무리해야 합니다.

4. 성경은 다윗의 인생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눕니다. 그 중앙에 밧세바 사건이 있습니다. 전반부에 매력적이고 영웅적인 다윗의 면모가 후반부에서 그저 연명하는 수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의 실제 인생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다윗을 영웅으로 그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의 후반전이라는 현실을 살아갑니다.

5.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우회해 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신자라면 ‘믿음의 조상이 누구지?’ 하면 ‘아브라함’이라고, 다 알고 있습니다. 정말? 하면 거기에는 조금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최고의 믿음을 가졌기에 믿음의 조상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과정을 지나서 완성되는가?를 인생으로 보여준 사람이기에 ‘믿음의 조상’입니다.

다윗을 보는 정당한 관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의 성실함으로 인해서 얻어진 평판, 그리고 세상에서의 축복을 우리는 사모합니다. 그러나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그것들이 하나 둘씩 무너집니다. 그 무너진 자리에 은혜가 담깁니다. 우리가 다윗을 영웅시 하는 것은 대리만족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후반전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6. 다윗의 전기 초반에 일어난 다윗의 위대한 영웅성이, 그의 깊고 사려 깊은 성품이 밧세바를 못 이깁니다. 다윗 떼찌! 그럼 못써! 라고 넘기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처럼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선언됨으로, 그는 영원히 부끄러운 족보를 남깁니다. 바로 그 그릇에 예수님이 담기십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후반전 같은 우리의 인생에 희망이 있는 겁니다.

7.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우리는 다윗이 겪은 민망함, 그의 애매모호함, 그의 자책들이 동일하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환경들이 우리를 생각하게 하고 고민하게 합니다. 잠 못 이루는 밤을 만들고 우울증을 만들어 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성의, 의지, 각오, 이상 이런 기대하고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에서 어떻게 벗어 나는가를 고민합니다. 벗어나려해도 탈출구가 없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담깁니다. 그러자 그분의 성품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사랑, 이해, 용서, 인내, 섬김… 이런 멋진 것들이 우리의 성품에 담기는 것입니다.

8. 사람이 돈이 많아지고 시간이 남아돌면 절대로 좋은 쪽으로 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억지로 포기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뛰어 넘으라는 얘깁니다. 결국은 없어질 것, 영원한 나라에서 아무 쓸모 없는 것, 사망의 지배를 받는 것, 거기에 영생을 담으라는 것입니다.

9. 어떤 사람이 평생을 일해서 황금을 이만큼 모았는데,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너무나 억울해서 ‘내가 천국 갈 때 이 황금 만큼은 꼭 가지고 가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천국의 문지기가 ‘후회할텐데…’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흘리며 허락을 해줬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끙끙대며, 그 무거운 황금을 가지고 천국에 도착해보니, 길바닥 보도블럭이 다 황금이었다는 얘기를 들어보셨습니까?

10. 기독교 신앙의 승부처는 ‘가치관’의 싸움이고, ‘세계관’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이름으로 그은 첫번째 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편이십니까? 저들 편이십니까?’입니다. 인종주의, 계급주의, 성차별주의, 세대주의, 국가주의, 교파주의, 교리주의… 판단거리를 찾는 끝없는 탐구가 지겹지 않으십니까? 자기와 다름에 대하여 반대하고 공격하는 세상의 흐름에 계속 굴복하며 사시겠습니까?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나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 5:4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