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 미니스트리/2024 말씀을 걷다

2024 말씀을 걷다 출애굽기 16-19장

제주한교회 2024. 1. 22. 09:26

출애굽기 16-19장

이집트를 떠난 지 한 달이 되었고(출애굽기 12:6, 31, 민수기 33:3). 이스라엘은 신 광야에 도착해 있다. 그들은 신 광야에서 애굽에서 먹던 고기와 빵을 추억하며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 했다. 첫 번째 원망은 바로의 추격을 당하던 비하히롯에서(출애굽기 14:12), 두번째 원망은 마라에서(출애굽기 15:24), 그리고 이제 세번째로 신 광야에서 원망한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 하리라]”(출애굽기 16:4) -> 하나님은 하늘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것으로 그들을 “시험하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험하시며 그들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내신다.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있는 것, 그들의 실력을 모르시기에 시험을 통해서 알아보시려는 것이 아니다. 시험을 통해서 그들 스스로, 그들의 안에 품고 있는 것을 대면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면 그들의 원망이 그칠까? 결국 만나와 메추라기의 기적에 대한 감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시험하시겠다’는 말씀은 그런 이스라엘의 마음을 드러내시기 대면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열 가지의 재앙과 홍해를 건넌 무시무시한 사건이 그들의 쓴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예수님을 믿고, 경험한 그때의 감격과 기적이 오래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문제의 뿌리가 그들이 당하는 외적 ‘조건’이 아니라, 썩어 있는 마음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그들을 시험하심으로 그들 마음의 문제를 드러내셨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 도다.” (출애굽기 16:2-3) 이들은 자기를 속이고 있다. 그들은 애굽에서 그리 풍요롭지 않았고,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벽돌을 구으며 노예로 연명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과거를 과장하고 미화시켜 해석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 년 동안 행진한 거리는 640km였다. 직선거리로는 320km이다. 출애굽 이후 한 달이면 가나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아마도 그들은 급하게 한 달치 식량을 준비해서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 신 광야에 있다. 신 광야는 그들이 떠난 고센에서 남동쪽으로 아직 시내 광야에도 미치지 못한 곳이다. 그곳에서 먹을 것이 떨어지자 ‘우리가 이집트로부터 해방된 가치가 무엇인가?’를 놓고 불평한다. 그들의 불평 속에 그들의 가치관이 들어 있다. 그들은 출애굽을 ‘배불리 먹는 것(세상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불평의 정체가 민수기에서 이렇게 드러난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하니” (민수기 11:5-6)

여기 나오는 음식들은 모두 정력제이다. 그것을 먹지 못해 ‘기력이 다했다’고 한다. 만나는 ‘하늘에서 온 것’이며, 백성들이 없다고 불평한 것은 인간의 정욕이 요구하는 ‘땅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는 원망에서 그들이 항상 비교하는 곳은 ‘애굽’이다. 그들은 [애굽에 있을 때]를 입에 달고 불평하고 원망했다. 그러나 애굽은 지나간 과거이며, 결코 돌아갈 수 없다. 그들의 목적지는 [가나안]이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며 [이미 경험된 애굽], 곧 노예로 살던 모습, 생각, 가치관과 미래의 약속인 [가나안]에 대한 믿음이 계속 충돌한다.

홍해를 건너 구원을 받은 백성은 광야를 지난다. 가나안을 약속으로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서있는 현실의 자리는 광야였다. 약속을 가졌지만 아직 이루어 지지 않은 자리에서 이스라엘은 불평했다.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며 바다 가운데를 걸어왔지만 약속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그들이 걷는 광야는 연속성이 없어 보인다. 최소한이라도 애굽 보다는 나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진전과 발전의 과정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그들의 표현대로 ‘애굽 만 못하다’는 것이다. 거울 안에 보여지는 나의 표정에는 신앙의 진전은 없어 보이고, 양심만 괴로운 표정을 보고 놀라고 있다.  

저들이 얻는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실하신 인도하심으로 갈 것이지만, 저들이 경험하는 현실은 그들이 경험한 구원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과 일치하지 않는 현실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시험했다. 홍해를 가르신 열심으로 그런 간섭으로 아직도 우리 주변에 계신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 이것이 약속과 성취 사이의 갈등이다. -> 이 때 우리는 광야가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영원한 나라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길이 광야이다. 광야는 바다에 난 길과 동일하게 우리에게 필요하기에 간섭하시고 준비하신 하나님의 길이다. 우리는 광야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함을 배운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떡으로만 살려는 모든 것을 다 죽이신다. 이제 40년 동안 그들은 불순종으로 죽어간다.

[기도]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So Moses said to Aaron, "Take a jar and put an omer of mannain it. Then place it before the LORD to be kept for the generations to come.”(출애굽기 16:33)

영생에 잇대어 있지 못한 가치가 인생의 목적이 되지 않게 하시고 그것을 은사로 알아 땅에서 심고 하늘에서 거두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함께 광야를 걷는 형제와 자매들을 격려하며 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