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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말씀을 걷다 민수기 13-16장

제주한교회 2024. 2. 14. 11:04

민수기 13-16장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의 문제를 처리하시는 기록이다. 민수기 11장은 육신의 탐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12장은 그릇된 편견과 판단에 대해서 말씀하고, 13장은 불신앙의 문제를 다루고, 14장은 불순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계속해서 16장에는 당을 지어 모세를 대적한 고라 자손의 반역 대한 이야기와 민수기 20장에는 므리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21장에는 불 뱀 사건이 나타나 있는데, 이 모든 사건사건마다 우리 육신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광야]라는 신앙 여정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들을 처리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 하시는가? 죽이신다. 민수기에 보면, 죽이라. 진멸하라. 멸절하라고 하시는 데, 죽고, 죽고, 또 죽는다.
 
민수기 13장은 가나안 정탐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어떤 문제를 드러내시는 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여기에 정탐꾼들이 이름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그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기억한다. 그래서 “역사는 믿음으로 그 땅을 취하자고 한 갈렙과 여호수아 만을 기억한다!”라고 적용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이 초점은 아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땅을 먼저 보여주신다. 그리고 그 땅을 ‘너희의 것’이라고 하시지?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직]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것이 민수기의 중요한 구조이다. 곧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의 사이에서 우리 안에 있는 무엇이 드러나는가?] 라고 질문하고 그 답을 찾아가야 한다. 이렇게 되면 열 정탐꾼 중에 갈렙과 여호수아는 오히려 조연이고 주인공은 불평을 한 다른 정탐꾼들이 된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진멸해야 할 것, 죽여야 할 것들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갈렙과 여호수아가 아니다. 자화상이 빈약하고 불평하는 나머지 정탐꾼에 더 가깝지?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그들을 보내며 이르되 너희는 네겝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그 땅이 어떠한 지 정탐하라”(민수기 13:17-18a)
 
이 사건의 흐름에서 모세가 어떤 마음으로 그들을 보내는 지의 느낌을 번역으로는 감지하는게 어렵다. 간단하게 설명 드린다. ‘네겝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라’는 말은 ‘건조한 네게브 광야의 길로 해서 산지로 올라가라’는 뜻이다. 바란에서 네게브 광야를 지나 산지에 올라가면 거기부터 비옥한 땅이 펼쳐진다. 이렇게 메마른 땅을 지나가다가 비옥한 땅을 만났을 때의 느낌을 생각하면 된다.
 
“그 땅이 어떠 한지 정탐하라. 곧 그 땅의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와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와 사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라. 담대하라.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 하니 그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더라”(민수기 13:18-20) ->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 그 땅에 좋은지 나쁜지 그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왜 탐지하라고 하지? 그 곳을 점령해야 하기 때문이다. 곧 좋은 소식을 가져오라는 것이지.
 
“이에 그들이 올라가서 땅을 정탐하되 신 광야에서부터 하맛 어귀 르홉에 이르렀고, 또 네겝으로 올라가서 헤브론에 이르렀으니 헤브론은 애굽 소안보다 칠년 전에 세운 곳이라. 그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 또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거기서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따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포도를 베었으므로 그곳을 에스골 골짜기라 불렀더라” (민수기 13:21-24)
 
가나안의 세가지 열매가 나오는데, 포도와 석류와 무화과이다. 성경에서 [석류]는 평화를 상징한다. [포도]는 두가지 의미를 가졌는데 본문에서는 기쁨을 상징하고, [무화과]는 이스라엘과 축복을 상징한다. 이 열매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의 풍요로움을 말씀하고 있다.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바란 광야 가네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보고하고 그 땅의 과일을 보이고,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 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민수기 13:25-27)
 
그들이 가나안 정탐을 마치고 보고를 할 때 그곳에서 가져온 과일을 보여주었다. 그 과일은 포도와 석류와 무화과였는데, 기쁨과 평화와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그것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단어가 나온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큰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민수기 13:28)
 
[However]… [그러나], 이것이 항상 문제이다. 이 ‘그러나’는 불신의 언어이다. 잘 나가다가 ‘그러나’로 돌아오면 미끄러진 것이다. 우리가 ‘그러나’라는 단어를 쓰면 그 뒤에는 ‘그러나’에 합당한 언어가 나오고, 그 언어가 신앙의 태도를 결정하고, 신앙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러나]라고 말한 순간 불신의 언어로 무장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 ‘그러나’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수기 14:11)
 
하나님께서는 ‘그러나’를 [불신]이라고 하시고, [하나님을 멸시했다]고 하시지?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민수기 14:22)
 
‘열 번이나 나를 시험했다’는 말씀은, 계속해서 불신했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민수기에서는 계속해서 불신앙의 표현들이 등장한다.
 
이제 두번째 불신의 언어가 나온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수기 13:30-33)
 
첫번째 불신의 언어는 ‘그러나’였다. 그리고 두번째 불신의 언어는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이것도 불신의 언어이다. 우리가 보기에 크든지 작든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크기의 싸움이 아니라 믿음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죄를 안고 산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보다 크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 하니라”… 이스라엘은 그들과 우리를 비교했다. 하나님이 없다. 자꾸 나, 나, 나 하니까 내가 약하면 절망하고, 내가 강한 것 같으면 교만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 산다.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다. 만물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 안에 살면서 지금 그것을 두려워한다. 이것은 애초부터 크기의 싸움이 아니다. 다윗이 어떻게 골리앗을 이겼지? 성경이 다윗을 통해서 무엇을 드러낼까? 이 싸움이 크기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클지라도, 우리의 문제가 아무리 커도, 우리의 상황과 환경이 아무리 크게 보여도 하나님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나로 인해 원인 된 것이 아닌 것을 통해서 오직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제 세번 째 불신의 언어가 나타나 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민수기 13:32)
 
세번째로, [악평]이라는 단어가 불신의 언어이다. 불신의 마음이 가득하면 모든 상황과 사건을 바라볼 때 악평을 한다. 악평은 ‘부정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다. 불신의 마음에서는 악평이 나오고 믿음의 마음에서는 호평이 나온다. ->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멘]이다.
 
그들은 아낙 자손들을 보았다. 성이 높았다. 당신에게 아낙 자손은 누구일까? 여러분의 자리와 환경이 철통 같은 성읍으로 보이실까? 가나안의 싸움은 그 거인과, 그 힘의 싸움이 아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싸움 이다. 문제가 크고, 죄가 중 해도 하나님은 더 크시다… 우리가 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가 중요하다.
 
이제 네번째 불신의 용어가 나타난다.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수기 13:33)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바로 자기 연민이다. 자기를 생각하면서 자기가 너무 불쌍해 보이는 것이다. 우울하게 보면 우울하고, 값싸게 보면 값싸게 보이는 것이 인간의 눈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보신다. 그런데 정탐꾼들은 자기 자신을 메뚜기 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오기까지 세 단계를 거쳤다. 1)그러나, 2)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다! 3)악평을 거쳐서, 이제 4)메뚜기에 도달한 것이다. 이것이 메뚜기 컴플렉스(grasshopper complex)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아도 나를 몰라도 심지어 내가 나를 몰라도 하나님은 나를 아신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 내 본질을 아시고, 내 뼈 속까지의 고민과 문제를 아신다. 그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나는 메뚜기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나는 중요하고, 나는 아름답고, 나는 존귀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화상이다. 그러므로 누가 당신을 못났다고 하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메뚜기 컴플렉스에는 또 한가지의 문제가 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수기 13:33)
 
자기 스스로를 보는 관점도 그릇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기를 보는 관점도 메뚜기 같아 보인다고 생각하지? 1)그러나 2)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3)악평하여 가로되 4)메뚜기 컴플렉스이다. 그 결과 [왜곡된 자화상]이 만들어 졌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민수기 14:28-30)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이 들린 대로 그들에게 행하신다고 하셨다. 이제 계속해서 이스라엘은 죽는다.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는 그 날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 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네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리라 하셨다 하라” (민수기 14:33-34)
 
왜 사십 년을 광야에서 지내야 하는지 아시겠지? 이제 하나님은 사십일을 사십 년으로 해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을 죽이신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죽이실까? [살리시기 위해서] 죽이신다.
 
[기도]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LORD is with us. Do not be afraid of them. (민수기 14:9)
 
우리의 입에 파수꾼을 세워 주옵소서. 불신의 언어가 나오지 않게 축복의 언어를 채우며 살겠습니다. 불평이 불신임을 알겠나이다. 특별히 힘들고 낙망 할 때 여전히 성실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담대하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