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2-14장
2020년 4월 16일(목)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열왕기상 12-14장
1. 솔로몬의 뒤를 이어 르호보암이 왕이 됩니다. 백성들은 솔로몬 때 부과된 무거운 세금을 가볍해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르호보암은 거절했고, 이로 인해 10개의 지파가 북이스라엘을 세우고, 여로보암이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는 세겜과 부느엘에 요새를 건축하고 국방을 든든히 합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문제에 착수합니다. 매년에 한번씩은 백성들이 성전이 있는 남유다 예루살렘에 가야하므로, 북왕조의 정체성에 위협을 받게 되므로 그는 북왕국의 벧엘과 단에 단을 쌓고 금송아지를 세워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우상을 섬기게 하는 정치적 종교적인 방법으로 북왕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합니다.
2. 이 문제로 인해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불신앙의 대표적인 이름이 됩니다. 열왕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을 ‘다윗의 길로 행했다’고 기록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불신앙의 생애를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고 명명됩니다. 이것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해보면, 우리는 다윗의 시편 23편을 외우면서도 여로보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히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현실은 신자로서 감당하기에 만만치 않아서 고통을 경험하며 삽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지만 이겨낼 힘이 없으며, 하나님은 곧바로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믿어지지 않는 일이 생기며, 그래서 이상한 신자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어느 인생이나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죄인된 까닭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사는 자가 겪는 당연한 현실 속에서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미미합니다. 문제는 이런 문제에 대한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인가?입니다.
3.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없는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태 6:30-32)
이 말씀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의’는 쌓는 것이 아니라 물이 채워지는 것처럼 ‘채워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씀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답입니다.
4. 세상이 우리를 위협하는 본질은 우리로 하여금 내일 일을 오늘 걱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일을 확보하고 조종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손에 쥐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권세, 부, 건강 등등 입니다. 이런 것들은 세상에서 힘을 쓰는 것들입니다. 결국 그런것들을 의지하면 우리의 내일은 다시 세상일 뿐입니다. 세상에서 살려면 그런 것들로 무장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것을 원하고 하나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상기한 말씀에서 우리가 그토록 염려하는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야 하기에 확보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당연히 주신다고 합니다.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꽃을 보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을 보라… 너희는 그것보다 ‘나를 구해라’라고 하십니다.
5.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길로 경고되는 것처럼, 세상의 것에 끌려가는 인생이 되지 말고 ‘나를 붙드는 싸움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동행은 ‘즐거운 존재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되기를 원하시고 당신을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사는 것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오늘과 내일의 필요가 사랑을 통해서 채워질 수 있도록 살아여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고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좋은 것을 가지기 위해 하나님을 팔았습니다.
6. 우리가 고통 속에 들어가면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묻습니다. 이러한 고통속에서 인생은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를 물을 때에는 세상은 더 이상 밥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그러한 것들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놓고 답이 되는가?를 물었을 때, 그게 아님을 확인하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 전까지 우리는 학교에 진학하면, 직장을 가지면,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다 크면… 하는 조건에 노예가 되거나 탓하며 살아야 합니다.
7.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 17:3) 기독교 신앙은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지적 깨달음이나 정보를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매우친밀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자격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unconditional). 우리의 처지나 모양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믿어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한숨을 쉬는 이유는 그 사랑이 멈추지 않고 계속 우리에게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각이 유일한 존재인 것으로 사랑하십니다. 이것을 놓치면 인생은 답이 없습니다.
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한 15:9-12)
예수님은 사랑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율법도 지키지 못하고 사랑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사랑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동행의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오늘을 그리고 내일도 나와 동행하자고 하십니다. 동행은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9. 우리는 하나님이 현실에서 필요한 부분에서 찾습니다. 끊임없이 세상을 장악하는 방법과 그 결과를 달라고 구하면서 하나님 자신을 찾는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두려움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일이 두려운 것입니다. 기쁘면 고통이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은 우리가 사는 동안 외면할 수 없고 피해갈 수 없습니다. 우리 세상 속에서 살기 때문이고, 고통은 하나님의 지극한 임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통이 기쁨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편 23편)
10.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 곁에 당신을 도울 환경과 사람을 보내주셨습니다. 조건없이, 이유도 없이 당신의 은혜가 당신에게 족하도록 ‘이미’ 주셨습니다.
여로보암의 길과 다윗의 길은 이 차이를 보여줍니다. 여로보암의 길은 자신이 만드는 길입니다. 다윗의 길은 형통함의 길은 아닙니다. 그는 도망다녔고, 망명하여 미친체 하여 호구를 벗어난 적도 있고, 자기의 사람들과 재산이 탈취되어 더 이상 울 기운이 없이 울어버린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길은 고통이라는 환경속에서도 하나님을 즐기고 기뻐하는 길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