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9-22장
2020년 4월 20일(월)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열왕기상 19-22장
1. 아합은 이스라엘의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고 공박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아합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로인해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이 갈멜산에 모입니다. 그들은 종일 바알을 불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엘리야가 제단을 쌓고, 재물을 올려놓고 물을 붓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자 불이 내려서 물에 젖은 재물이 탑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라는 표현은 엘리야의 승리에 대한 표현입니다. 엘리야가 제물과 나무위에 물을 부으라는 것은 그것이 완전히 젖었다는 것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불을 붙일 수 없는 상태를 만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불이 아니고서는 불이 타오를 수 없게 한 것으로, 현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메세지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린 불이 엘리야 사건이 가진 메세지는 아닙니다.
2. 이제 정말 중요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열왕기상 19:1-2)
아합은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이고 이세벨은 이방여자입니다. 그들의 결혼은 정략적인 것으로, 그 이면에는 이세벨을 통해서 우상이 들어왔음을 상징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는 섞인 것, 혼합된 가치관으로 말씀이 멈추어진 상태입니다. 그 징후로 3년동안 이스라엘에 가뭄이 임한 것입니다. 이때 엘리야가 850:1의 격전을 갈멜산에서 벌입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KO승을 합니다. 그것을 아합이 목격합니다. 열왕기상 19장은 갈멜산의 격전을 목격한 아합이 실권자인 이세벨에게 말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3. 그러자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선언합니다. 이세벨의 말을 들여다보면, ‘무슨 뜻일까?’하는 의문이 나오는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상기했던 19장의 시작을 봅니다.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열왕기상 19:1-2)
이세벨이 사신을 보냅니다. 이세벨의 위치에서 엘리야를 죽이는데 사신까지 보낼 필요가 있었을까? “내일 이 맘때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이세벨이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했을까? 말씀은 말씀이 답해줍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입니다. 이 말 속에는 이세벨이 엘리야를 당장 처단하지 않고 먼저 고지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세벨은 엘리야와의 문제를 정치적인 도전이 아닌 영적인 문제로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풀어내려면 영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어떤 관점에서 보고 이해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의 세계관(Christian World View)’에 대한 것입니다.
4. 전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힘든 부분 중에 하나가 이런 부분입니다. 성도들의 헌신을 캐스팅 하기 위한 목회적 방법들이 있습니다. 안수기도를 해주든지, 설교 중에 무릎을 꿇게하고 함께 기도하든지, 기적이나 시청각적으로 헌신의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아멘을 크게하고, 빨리하면 목회자들은 신이 나고 매우 격려를 받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본질이 아닙니다.
이 그림을 엘리야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그는 행동하는 선지자, 능력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엘리야를 두렵게 합니다. 우리는 이세벨을 통해서 이 대선지자가 무너지는 이유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야 하며, 그 속에 메세지가 있습니다. 이세벨은 이 싸움을 영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이 이 전쟁의 성격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 두려움을 갖게 되고 무너지게 됩니다. 이게 무엇인지를 추적해 보아야 합니다.
5. 이제 엘리야는 사환 한명을 데리고 광야로 도망칩니다. 그리고 로뎀나무 아래서 여기서 끝내자고 하나님께 이야기합니다. 이제 어쩔까요? 지금 엘리야는 낙심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낙심(落心)은 마음을 떨어트리는 것(lose heart)입니다. 엘리야는 급히 사환 한명과 함께 유다로 피신하고, 거기에 사환을 남겨두고 광야로 하루길을 더 도망가다가 그곳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엘리야의 상태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이 형편을 보고…”(열왕기상 19:3)에서 ‘형편을 보았다’는 뜻은 두려움이 아니라 ‘숙고했다’는 뜻입니다. 즉 낙심의 의미와는 다른 표현입니다. 엘리야는 ‘깊이 생각해 본 것’입니다. 이제 그의 생각이 메세지가 됩니다.
6. 지금 엘리야는 자신이 예상한 것과 다른 빗나간 결과를 경험했습니다. 갈멜산의 엄청난 승리, 기도로 손바닥 만한 구름을 띄우고, 단비를 내리는 기적을 경험한 후입니다. 그런데 아합도 이세벨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 기적을 보고도 세상은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예상했던 결과가 빗나간 것입니다.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열왕기상 19:3상)라는 말씀은 자기가 믿고 있는 신념체계가 무너진 상태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숙고하는, 곧 내적인 충격을 받는 엘리야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신념체계에 대한 갈등으로 심각한 우울증에 빠집니다.
7. 그러면 엘리야의 신념체계는 무엇입니까?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입니다. 그것이 무너진다는 것은 죽음 이상의 문제였습니다. “자기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에서 ‘내피쉬’, 생명이라는 단어는 생물학적 목숨이 아니라 신념, 자기가 믿고 있던 ‘가치관의 체계’입니다. ‘도망했다’는 단어인 ‘에라크’는 무서워서 도망했다가 아니라, 번민한 끝에 손을 털었다는 뜻으로, ‘이건 아니다!’, ‘뭔가 잘못되었다!’라고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엘리야는 이 생각을 끌고 자살로 가려고 합니다.
저는 솔직이 이런 우울함에 자주 빠집니다. 거기에 더해서 마음으로 소외되고 연약한 성도들을 돌보는 목회를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눈물과 아픔에 제대로 동참하지 못하고, 바로 살아야 한다고 설교하면서도 그렇게 살아내지 못하고, 올곧게 살아가지 못하는 부유한 기득권층에 대해 그들이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회개를 촉구하지 못하고 예언자적인 메세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 의도하지 않게 내 자신의 부주의한 말과 경솔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는 일 등이 더해져서 디프레션이 올 때가 많습니다.
8. 엘리야는 로뎀나무에 도착합니다. 로뎀나무는 카페이름으로 붙이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광야의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잡목으로, 빗자루같이 뻗어 있는 나무로 로뎀나무 아래 누워잤다는 말은 광야의 비참함을 상징하는 ‘자살나무’입니다. 또 ‘시궁창’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 길쯤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열왕기상 19:4)
엘리야는 자살나무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이것은 엘리야의 중요한 자기고백입니다. 그렇게 열심이 유별났는데, 최선을 다했는데, 교회를 위해 모든 헌신을 다 했는데, 그 결과는 나만 홀로 남았다는 뜻입니다(열왕기상 19:10). 그는 열왕기상 19:14절에서 또 다시 자신의 유별난 열심을 말하면서 자기 혼자 남았다고 말합니다.
9. ‘혼자 남음’은 엘리야의 절대고독입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들과 같이 자신의 어떤 자리매김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열심이 유별났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그렇게 열심을 냈는데, 이런 결론은 아니지 않습니까? 라는 절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야 같은 대선지자의 낙심이 어디서 연유된 것인지를 추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이 말씀의 현장으로 가서 직업 걸어야 합니다.
10. 우선 850:1의 영적인 전쟁터로 돌아가서 시작해봅니다.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열왕기상 18:19) 지금 엘리야가 이 전쟁을 먼저 제안했습니다. 우리는 갈멜산 전투에서 승리한 엘리야에 초점을 두지 말고, 이런 제안을 누가 했는가?를 질문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런 제안으로 ‘참된 신을 증명하는 태도가 건강한 것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너의 신이 쎈지, 나의 신이 쎈지!
그래서 아합이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읍니다. 그랬더니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느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열왕기상 18:20-21)
이제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선지자는 나 홀로이고,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명이라고 말하면서, 송아지 둘을 가져와서 각각의 방법으로 제사를 드려서 어떤 신이 응답하는지 보자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엘리야가 주도적으로 제안합니다. 곧 누구의 신이 참된 신인지 증명하는 방법이 엘리야에 의해 정해집니다. 그리고 싸움이 시작됩니다.
11. 이렇게 열왕기상 18장에 반복되는 패턴이 하나 발견됩니다. 바로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입니다.
제사가 시작되고, 바알와 아세라 선지자들의 제사에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종교행위가 광란으로 채워져도(열왕기상 18:28),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나고 그들이 미친듯 떠들어 저녁이 이르렀지만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열왕기상 18:29)
이제 엘리야의 차례가 됩니다. “저녁 소제를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제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열왕기상 18:36-38)
12. 이 광경을 읽지말고, 그 장소에서 보는 겁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역사의 증거는 ‘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에 ‘반드시 나타나야 할 한가지’가 빠져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걸으면서 꼭 보여야 할 한가지가 없어진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바로 ‘말씀’이 없습니다. 이 엄청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한마디로 한단어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갈멜산의 기적 어디에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13. 우리는 엘리야의 낙심의 원인을 이제 추적해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기적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기적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입니다. ‘관계’입니다. ‘말씀’이십니다. 엘리야는 기적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보고 놀랍니다. 그리고 도망치면서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뭔가가 빠져 있는데…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엘리야는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14.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열왕기상 19:8)
바로 ‘호렙산’입니다. 이 호렙 산에 하나님이 엘리야를 세우십니다. 앞의 18장에 나타난 주도권이 이제 엘리야에게는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공급하심에 ‘의지하여’ 호렙산에 이릅니다. 그 호렙산에서도 엘리야는 자신의 열심이 유별남을 하나님앞에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5. 하나님은 세가지 현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람, 지진, 불입니다. 거기에 공통적인 현상은 거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메세지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너에게 나는 모든 것을 뒤집는 바람같은 하나님이냐? 너에게 나는 세상을 뒤집는 지진이냐? 너에게 나는 모든 것을 사르는 불이냐? 그랬으면 좋겠느냐?라는 메세지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는 하나님이 말씀을 안하십니다.
16. 그리고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이 ‘세미한 소리’와 함께 드디어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여기 세미한 소리의 의미는 ‘조각가가 돌을 깍고 쪼아 새긴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건이 어디서 일어납니까? 호렙산입니다. 그러면 호렙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모세가 올라서 하나님이 친히 돌판에 새겨준 말씀을 받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엘리야를 다시 모세가 섰던 호렙산에 세우신 겁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주신 ‘말씀(세미한 소리)’을 주십니다. 이 메세지는 ‘나는 현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의 하나님>이라’는 것, 이야기 하시는 하나님, 인격이신 하나님 입니다. 이 사건으로 엘리야는 드디어 성경에서 모세와 비견되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입니다.
17. 이스라엘 공동체(교회)가 살아나는 유일한 방법은 ‘말씀’이라는 메세지입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의 호령 앞에서 두려워 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그가 ‘말씀을 떠난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말씀이 없었기에 하나님을 불, 바람, 지진으로 증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보여주는 일을 만들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말씀의 전달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드러나는 은사로 사역을 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만한 실력이 저에겐 너무 부족하고 간절합니다.
18. 우리 믿음의 초대 조상들이 붙잡은 가장 장한 일은 그들이 말씀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말씀이 복음인데, 어느샌가 잘사는 것이 복음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오므리 왕조의 실세였고, 그 치세안에서 아합같은 인물이 배출된 것이며, 그 잃어버린 말씀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라는 것을 계시하는 선지자가 엘리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호렙산, 모세에게 주셨던 말씀의 현장에 세우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