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1-4장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역대상 1-4장
1. 역대기는 바벨론 포로 이후 귀환 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원독자로 합니다. 70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예루살렘은 다윗과 솔로몬의 영화를 찾을 수 없는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보호하는 성벽도 무너졌고, 성전도 훼파되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은 했지만 그곳은 히브리 왕 대신에 바사의 총독이 다스리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에서 마이너리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했고, 다윗과 솔로몬의 영화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더욱 비참했습니다.
역대기는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이 직면한 초라한 예루살렘의 모습과 같이 초라한 그들의 무너진 자화상을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연대기적 역사서가 필요했고, 그래서 아담으로부터 시작하는 역사로 시작됩니다.
2. 역대기는 이스라엘의 정통성이 남유다로 이어지기 때문에 북이스라엘이 제외되고 남유다의 역사만 포함시킵니다. 그리고 열왕기와는 달리 왕들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성전’에 초점을 맞춥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제사장적 사관’이라고 하는데, 예배, 예배의 규정과 질서, 우상적 예식에 관련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3. 역대기는 선지자적 관점에서 기록된 책이 아니라, 제사장적 관점에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강조되고, 왕의 선함과 악함의 기준이 레위기의 제사법에 기준해서 판단됩니다. 이 부분에서 현독자인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은, 현독자들은 제사장적 영성보다, 선자자적 영성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적 영성은 삶의 자리에 현실적인 문제와 수평적 인간관계에 대한 신앙적 적용이기에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합니다. 그러나 제사장적 영성은 제사와 의식을 강조하며,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준하여 초점을 둡니다.
4. 그리고 또 한가지 어려운 점은 ‘족보’입니다. 오늘 우리는 역대상 1장부터 상당히 발음하기 힘든 사람들의 이름만 계속 읽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름만 먹을 것입니다. 이 이름들을 부르기가 힘들어도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걸어보십시오. 한 사람의 이름은 한 사람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도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싶다.” 김춘수 <꽃>
5.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샘, 함과 야벳은 조상들이라”(역대상 1:1-4) 이 역대기의 족보는 ‘정통성’의 족보입니다. 아담에게는 가인과 아벨이 있는데, 그들의 이름은 없고 ‘셋(Seth)’이 나옵니다. 곧 ‘아담의 계보를 셋(Seth)이 이었다’는 뜻입니다.
6. 여기 몇 사람의 이름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담은 ‘흙’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아담을 통해서 인생의 본질이 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흙에서 태어나, 흙집에서 살면서, 흙을 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가인’이라는 이름은 ‘물질(material)’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인으로 말미암에 이 세상에 인본주의적인 물질문명이 시작됩니다. 가인의 동생은 ‘아벨’입니다. 아벨은 ‘허무’, ‘공허’, ‘수증기’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벨이 죽고 아담은 셋(Seth)를 낳습니다. 셋은 ‘다른 씨’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해서 셋(Seth)이라고 이름을 한 것입니다. 이 셋을 통하여 하나님은 새족보와 새문명을 시작하셨습니다.
7. 가인은 장남이었지만 아담이 뒤를 잇지 못합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가인이 여호와 갚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창세기 4:16)라고 기록합니다. ‘놋’은 ‘유리함’이라는 뜻으로 그의 인생은 하나님을 떠나서 유리하는 인생이 되는데, 이것이 인본주의의 뿌리가 됩니다.
8.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며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가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세기 4:25-26)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면서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기록함을 시작으로 성경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족보’를 기록했습니다(창세기 5장).
9.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시고, 사람을 통해 예배와 경배를 받으시기를 원하는데, 이 셋을 통하여 여호와를 예배하고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나오는 용어들을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6장에 가서 보면 셋의 자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 혹은 '하나님의 딸들'이라고 명하였습니다. 가인의 자손들은 '사람의 아들들' 혹은 '사람의 딸들'이라고 창세기는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지구상에 두가지의 문명이 공존합니다. 하나는 물질이라는 뜻을 가진 가인으로부터 세워진 물질적이고 인본적인 문명입니다. 다른 하나는 셋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신본주의적인 문명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쪽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열심히 농업과 공업과 과학과 예술을 발달시켜서 전쟁하는 문명이 시작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셋의 문화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의 문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10. 역대기에 등장하는 많은 이름들은 각각의 인생들입니다. 스토리가 있고, 사연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새겨진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 기억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3장까지 걷는데 사람들의 이름, 족보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3장까지는 두 부류의 계보입니다. 첫째 계보는 아담부터 다윗까지로 역대기 1:1-2:55까지입니다. 두번째 계보는 다윗부터 포로기까지의 계보로 3:1-24입니다. 그리고 4장부터 9:1까지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의 계보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시면 꽃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