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13-17장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역대상 13-17장
1. 역대기의 시작 부분을 걸으면서 우리는 긴분량을 할애하는 수많은 이름들을 지나왔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비인격적인 힘이나 추상적인 개념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 역사는 이름들로 짜여 만들어집니다. 저마다 존귀한 각 개인의 이름(존재) 말입니다. 역대기의 이름들은 기독교의 탈인격화를 막아줍니다.
2.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역대상 11:9)를 히브리어로 ‘할로크 브가돌(halok v’gadol)’은 ‘더 큰 걸음과 더 넓은 포용’으로 ‘자라났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친구는 가려 사귀십시오. 좋은 친구는 우리가 반드시 구해야 할 복입니다. 바로 ‘다윗’같은 사람입니다. 다윗같은 친구를 만나는 방법은 바로 ‘내가’ 다윗같은 사람이 되면 됩니다.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는 다윗의 성숙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성경이 소개하는 다윗의 이야기는 다윗이 ‘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3. 이제 다윗은 예루살렘 성을 정복했습니다. 수백년 동안 모두가 회피하던 지역, 누구도 이 귀신의 소굴을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조상 눈먼 이삭과 절름발이 야곱을 조롱하는 여부스 족속의 악한 패러디는 예루살렘에 있으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그의 조상 이삭과 야곱을 조악하게 만든 신상들을 산산조각 내버렸습니다.
4. 다윗의 이야기에서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는 말씀으로 다윗의 이야기는 큰 전환을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다윗이 연단을 받으며 점점 상승해온 이야기라면, 이제부터는 다윗의 통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노력합니까? 무엇을 위해 성장합니까? 그 노력과 성장 너머의 통치를 위해서 입니다. ‘통치’라는 단어에 ‘섬김’, ‘나눔’, ‘봉사’ 등등을 넣으면 됩니다. 나에게 있는 남보다 더한 것이 나눔이 되고, 남보다 덜 한 것이 ‘받는섬김’이 되면 좋겠습니다. 받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다윗의 통치에 대해서 사무엘하와 역대기에서 의미있는 문장이 나타납니다. 지금 우리가 역대기를 걷고 있으므로 역대기의 말씀은 인용해 봅니다. “…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역대상 11:2) 다윗에 대하여 ‘목자’ 그리고 ‘주권자(prince)’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 대하여, ‘목자’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로 양떼를 인도하듯이 나라를 인도해 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주권자’라는 단어는 ‘나기드(nagid)’라는 히브리어로 ‘백성의 애환을 아는’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와 주권자를 합하여 말하면, 다윗의 젊은 시절 목자였을 때의 직관과 기술을 발휘해서, 광야의 생활을 해본 사람으로 우리의 영도자가 되어 달라는 뜻입니다.
5. 이것을 시편에서는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시편 78:72)라고 노래했습니다. 마음의 성실함은 integrity of his heart 이고, 그 손의 공교함은 skillfulness of his hands입니다. 저의 사무실에 오시면 들어오고 나가며 저의 눈에 보이게 진열한 감사패가 두개 있습니다. 미국에서 사역하던 교회의 한어예배부와 영어예배부가 각각 저에게 준 감사패인데, 바로 상기한 시편 78:72이 한글과 영문으로 기록된 감사패입니다. 그걸 볼때마다 부끄러움이 앞서지만, 목회자에게 이보다 더 큰 찬사는 없다고 생각하고, 이 구절을 제 목회의 좌우명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실한 마음과 공교한 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에게 기대한 것은 ‘영도자’였습니다. 권력에 굶주린 왕보다 목자가 되어주기를 바랬고, 스스로 높이기 위해서 백성을 짓밟는 왕이 아니라 베들레헴과 시글락에서 처럼 살아주기를 바랬습니다. 다윗의 마음의 성실함과 그 손의 공교함은 씨줄과 날줄이 되어 이스라엘을 인도했던 것입니다.
6. 이제 장면이 바뀌어, 오늘 우리가 먹고 걷는 본문에는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다윗이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부르고 또 레위사람 우리엘과 아사야와 요엘과 스미야와 엘리엘과 암미나답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하게 하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올리라.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역대상 15:11-13)
7. 법궤는 20년동안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습니다. 다윗이 파란만장한 과정을 지나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예루살렘 성의 점령과 아비나답에 집에 있는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작업이었습니다. 예루살렘과 마찬가지로 법궤는 뗄 수 없는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하나님의 약속이며, 그들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증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기한 내용을 보면(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법궤를 옮기는 첫번째 시도에서 실패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베레스 웃사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며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역대상 13:7-10)
8. 법궤는 레위족속이 메어 운반해야 합니다. 그런데 웃사는 그것을 수레에 실었습니다. 그 수레는 잘 준비된 것이었을 것입니다. 웃사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화려하고 잘 준비된 수레로 법궤를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법궤는 ‘자기생각’이 아닌 하나님이 하라신 대로(출애굽기 25:13-14) 옮겨야 했습니다. 바로 레위지파가 메고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수레에 실려 옮겨지는 법궤를 보고 다윗은 좋아서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에는 그동안 법궤를 잘 모셔둔 웃사 가문에 대한 감사가 있었을까? 그것을 메어야 한다는 것을 깜박잊은 것입니다. 그때 사고가 납니다.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소들이 뛰어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잡습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웃사가 죽습니다. 이제 다시 역대상의 오늘 말씀으로 오면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궤를 메어올리라.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즉 법궤의 운반방법, 곧 하나님이 어떻게 하라고 하신 것에 초점을 두는 장면입니다.
9. 이 사건에서 다윗은 춤을 추고 있고, 웃사는 죽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천진난만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웃사는 종교인입니다. 웃사는 법궤가 마치 자기가 보호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람이 메어야 하는 ‘인격’을 밀어내고 수레, 곧 ‘비인격’을 사용해서 법궤를 옮겼습니다. 하나님을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자 안에 계셔 우리가 보호해드릴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을 책임 관리하려는 것이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종교가 아니라 ‘인격’이고 ‘관계’입니다.
10. 이제 다윗의 춤추는 솜씨를 봅니다. 그가 왜 춤을 추었을까? 다윗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웃사가 죽는 것을 보고 다윗은 화를 내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삐졌지만 다윗은 웃사처럼 죽지 않았습니다. 왜 일까요? 다윗에게 하나님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였고, 인격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춤을 추었지만 실력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 모습이 다윗의 아내 미갈에게는 마땅치 않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미갈은 다윗을 조롱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사무엘하 6:21)
우리는 다윗과 웃사, 그리고 미갈을 봅니다. 이 세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선 예배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춤추고 뛰놀며 노래하는 예배자입니다. 그리고 웃사도 예배자입니다. 그는 예배를 인도하고 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미갈은 예배의 관찰자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예배(신앙)를 관찰하고 판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나의 예배를 점검해 보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