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9-12장
2020년 5월 12일(화)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역대하 9-12장
1. 솔로몬 왕이 죽고 그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됩니다. 백성들은 대표들을 르호보암에게 보내서 솔로몬의 많은 역사들로 인해 지친 백성들에게 쉼을 주는 정치를 요구합니다. 이에 대해 르호보암이 거절을 해서 결국 10지파가 르호보암을 떠나 여로보암을 왕으로해서 북이스라엘을 세우게 됩니다.
2. 남북왕조의 분열이 이미 솔로몬 때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이방 나라의 공주들을 데려와 많은 처첩을 삼은 것이 원인이 되어 나라가 나누어 지게 될 것을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셨습니다. 우리가 보면, 르호보암 때에 나라가 나누어지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또 질문을 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나라를 둘로 나누기로 하셨다면, 르호보암의 결정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이런 종류의 질문을 우리는 여러 상황 속에서 해야 합니다.
3. 이에 대해서 성경이 하고싶은 이야기는 하나님은 우리가 다 한 다음에 평점을 주거나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간과 사건에 개입하시고 함께 오셔서 씨름하시는, 참여하시는 분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의 운명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고, 그 결과를 이루어 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선택하게 하시고, 그것을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셔서 개입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전체를 통해서 확인해야 합니다.
4. 야곱이 형을 속이고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축복을 받은 후에 형의 분노를 사서 외삼촌 집으로 피난가는 과정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창세기 28:10이하). 이 사건에서 야곱은 하늘에 닿은 사다리를 보고 위에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세기 28:13) 이 사건을 보아도 야곱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5. 기독교 신앙을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하심과 복주심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너무 단순화시키고 공식화합니다. 제가 젊은 목회자시절에 한 설교들을 보면, ‘무엇무엇으로 형통하는 10가지 법칙’, ‘예레미야 33:3을 통한 333기도의 법’, ‘사중복음의 4가지 에센스’ 등등 무엇을 법칙화하고 딱 떨어지게 공식화하는 설교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와 삶의 자리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이루어지는 ‘과정’속에는 매우 많은 소중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6. 야곱이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그를 승리케 하시고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걸 왜 가게 하시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받은 약속으로부터 20년이 지나서 돌아옵니다.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20년동안 부인 4명을 얻고, 거부가 되어 돌아옵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어서 편안하지 못하고, 조카들과 어려워져서 결국 돌아올 수 밖에 없었는데, 막상 돌아와도 형은 20년동안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어렵게 20년을 보냅니다. 이러한 야곱의 인생은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20년 내내 개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곱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마다 묻고 ‘씨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씨름이 사건으로 드러난 것이 얍복나루의 씨름입니다(창세기 32:22이하).
7. 얍복나루의 씨름시합에 좋은 클루(clue, 실마리)가 들어있습니다. 씨름을 하나님이 거십니다. 야곱은 씨름을 걸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야곱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이기지 못하셨다’는 것은 으랏차차 씨름이 아닙니다. 야곱이 꺽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말 표현이 아주 좋습니다.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하라”(창세기 32:26) ‘날 샜다’라는 표현이 함축하는 바가 의미롭습니다. 날이 밝았다는 의미 이상으로 ‘너는 날샜다’이런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러자 야곱이 매달립니다. ‘축복하지 않으시면 못가십니다’라고 합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어떻게 개입하셨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8.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을 의역하면 ‘약탈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기의 필요를 자기의 힘으로 쟁취했던 사람입니다. 좋게 말해서 그렇지 ‘강도’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얍복강에서, ‘자기가 약탈할 수 없는 것’ 곧 하나님 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구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네가 이겼다’고 하십니다. ‘야곱아 너 잘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십니다. 야곱의 전 생애에 걸쳐서 하나님은 계속 씨름을 걸어오셨습니다. 벧엘 사건에서도 야곱은 ‘자고 있었고’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9.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 구원과 승리케 하신다는 모든 약속과 허락하신 믿음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놓아두지 않으시고, 개입하십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묻는 씨름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자유롭게 살아나고, 자유롭게 반응해야 합니다. 사랑은 결코 강요하거나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의 뿌리입니다.
10. 신앙이 법칙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은 항상 ‘하나님과 나’라는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의 관계를 기계적이거나 법칙화되는 것을 못참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만들어지는 창조적인 영성(creative spirituality)을 원하십니다. 수천개의 마음이, 수천가지의 방법이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표현으로 수놓아지기를 원하십니다. 신앙은 인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