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조연 #5 리브가(이삭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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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함께 나눠볼 성경 속 조연은 리브가입니다. 리브가에 대해서 우리는 별로 아는 것이 없지만 사실은 창세기에서 꽤나 비중있는 인물입니다.
1. 이삭의 아내감을 구하러 떠난 아브라함의 종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을 때에 아내 사라를 통해서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낳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127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이삭을 위해 아브라함은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는 종을 불러 이삭의 아내감을 구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족속(함의 후손)이 아니라 멀리 아브라함이 떠나온 아브라함의 족속(셈의 후손)에게로 가서 구해오라고 합니다.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창24:4)
그 길은 800km에 달하는 엄청난 거리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낙타 10필을 가지고 출발하고 긴 여정끝에 나홀의 성에 도착합니다.
"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창24:10)
2. 우물가에서 기도하는 아브라함의 종
하란 땅 나홀의 성에 도착한 아브라함의 종은 성 밖 우물가에 도착해서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서 있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데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창24:12-15)
아브라함의 집에는 종들마저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를 마치자마자 성에서 한 소녀 리브가가 나오는 것을 보고 그는 그에게 물을 조금 달라고 청하는데 리브가는 흔쾌히 그에게 물을 내어주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가 데려온 낙타에게까지 물을 부어 줍니다.
"청하건데 네 물동이를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그가 이르되 내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동이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마시게 하기를 다하고 이르되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서도 물을 길어
그것들도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창24:17-19)
리브가의 말과 행동을 보면 리브가가 어떤 사람인지 눈에 보입니다.
오랜 여정으로 꼬질꼬질해진 낯선 남자를 경계하기보다는 그의 상황을 보고 흔쾌히 선의를 베푸는 모습, 그의 상황을 보고 낙타들에게까지 물을 부어주는 자상함과 판단력, 눈치 그리고 물웅덩이에 물을 적어도 10번 이상은 내렸다 올릴만한 신체적인 강인함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까지, 기도 응답을 떠나서 리브가는 아내감으로 며느리감으로 손색이 없는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아브라함과 같은 족속인 나홀의 손녀딸이라는 것까지 혈통까지도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르되 네가 누구의 딸이냐
청하건대 내게 말하라 네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유숙할 곳이 있느냐?" (창24:23)
"그 여자가 그에게 이르되
나는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이니이다" (창24:24)
만약 우리가 여러가지 조건을 가지고 기도힐때에 한가지만 충족시켜도 우리는 이미 기도 응답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한두가지 조건만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기까지 25년이 걸린 것이든, 리브가가 기도하자마자 바로 나타난 것이든 간에
오랜 시간에 걸려 하란 땅에 도착하자마자 기도응답을 받은 종은 그 길로 리브가의 집으로 가서 리브가의 아버지 브두엘에게 가서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한 명령과 자신이 하나님에게 한 기도와 그 응답을 알리고 리브가와 함께 돌아가기를 청합니다.
"내가 오늘 우물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만일 내가 행하는 길에 형통함을 주실진대
내가 이 우물 곁에 서 있다가
젊은 여자가 물을 길으러 오거든
내가 그에게 청하기를 너는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하여
그의 대답이 당신은 마시라 내가 또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도 길으리라 하면
그 여자는 여호와께서 내 주인의
아들을 위하여 주신 자가 되리이다 하며,
내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와서
우물로 내려와..." (창24:42-44)
아브라함의 종이라고 기록된 이 사람의 고백은 그 어느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 못지 않습니다. 내가 너의 딸을 만난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다 라고 말하는 담대함과 간증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당신의 뜻을 알려달라고 합니다. 무례하지 않습니다.
"이제 당신들이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내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알게 해 주시고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내게 알게 해셔서
내가 우로든지 좌로든지 행하게 하소서" (창24:49)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에 정말로 황당한 일들을 종종 보았습니다. 어느날 어떤 남학생이 평소 마음에 들어하던 여학생에게 찾아가 하나님이 내 배우자로 너를 약속하셨으니 나와 결혼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은 그 남학생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하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면서 집착을 하는 모습이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상당히 많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반대로 제 기숙사 룸메이트에게 같은 대학원에 다니는 어떤 여학우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서 부담이고 기분이 안좋다는 말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어린 시절 어느 선교팀이 무작정 저희 교회로 전화를 걸어 하나님이 이 교회로 가서 지내라 감동 주셨으니 자리를 내어달라 합니다. 그때에 저희 어머니가 그 선교팀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왜 하나님이 감동이 당신들에게만 있고
우리에게는 없나요? 정말 하나님의 뜻이었으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감동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뜻이라면서 자신이 맘에 드는 사람에게 가서 거짓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남들을 속이는 자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이런 속임은 세상에서 통하지 않고 교회에서만 통하는 거짓입니다.
아직 믿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청년들이 셀리더, 전도사, 목사에게 속아 넘어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자신의 욕심이고 뜻이고 사랑없는 말입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고전13:4-5)
하나님의 뜻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상대도 인정하고 수긍합니다. 브두엘과 라반이 인정하고 수긍한 것처럼 말입니다.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창24:51)
3. 가나안으로 온 리브가
아브라함의 종이 브두엘에게 리브가와 함께 돌아가기를 청할 때에 종은 바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브두엘은 갑작스럽게 딸을 떠나보내기 전에 며칠의 시간을 보내겠다고 합니다.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창24:55)
서로 뜻이 맞지 않자 본인을 불러 뜻을 묻자 리브가는 당장 떠나겠다고 합니다. 자신이 선의를 베풀어 쉬게 한 낙타의 등에 올라 이삭이 있는 브엘라해로이로 떠납니다.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창24:58)
리브가는 당차고 용기있는 여인입니다. 주저함이 없습니다.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곳을 향해 가는 것에 조금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한번에 떠나지 못해 몇번을 하나님이 직접 이야기하고서야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떠났다면 리브가는 말하는 즉시 부모와 형제를 뒤로 하고 떠납니다.
이삭이 낙타들이 오는 것을 보고 있을때에 리브가도 이삭을 보고 종에게 그가 누구인지 묻고 이삭인 것을 알자 곧바로 자기의 얼굴을 가리는 것을 보면 눈치도 빠르고 지혜롭기도 합니다.
" 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낙타에서 내려 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냐
종이 이르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너울을 가지고 자기의 얼굴을 가리더라"
(창24:66)
자신의 얼굴을 가림으로써 정식 혼인을 치르고 이삭의 장막에 들어가기 전까지 마땅히 할바를 스스로 알고 있는 리브가의 모습을 보면 이삭은 정말로 스스로 노력해서가 아니라 거져 복을 받은 사람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4. 이삭과 리브가, 쌍둥이를 낳다
이삭과 리브가가 혼인하여 20년간 아이가 없었습니다. 멀리 떨어진 곳으로 시집 온 리브가가 그 곳에서 안주인으로서 자리를 제대로 잡기 위해서는 아이를 낳는 것입니다. 그런데 20년간 아이가 없다는 것은 리브가에게 있어서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자신의 아내 리브가를 위해서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합니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창25:21)
이삭이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자마자 리브가가 아이를 임신하였는데 쌍둥이를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뱃속에서 쌍둥이들이 태동할 때에 리브가는 하나님앞에 기도합니다.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데"(창25:22)
별것아닌 태동이라고 느낄 수도 있는 일을 리브가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보며 우리는 과연 사소한 일을 하나님 앞에 구하는 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창25:23)
리브가에게 하나님은 이미 작은자, 동생이 큰자를 섬길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본문을 볼때면 아직 선악을 알지도 못하는 어머니 뱃속에 있는 아이를 왜 하나님이 차별할까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0-11)
하나님이 부르는 사람은 무언가 잘나서, 선하고 사랑받을 만해서 선택받을만한 대단한 사람이 아닌 보잘것 없고 사랑받지 못할만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잘나음이 아닌 하나님의 선택하심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또한 사람에게 시간은 한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과거로 돌아가지도 먼 미래로 먼저 가지도 못하고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이 흘러가는데로 따라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한 소설에서 주인공이 초반에는 포악하고 못된 사람이었지만, 중반부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서 변화되어 소설책 후반부에는 남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다고 상상을 해봅시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 5장을 읽고 맨 뒤로 가서 그 사람이 변화된 모습을 살짝 보고 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될지 이미 알고 그 소설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 위에서 입체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보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이 이미 먼 미래에 동생 야곱이 어떠한 사람으로 자랄지 에서가 어떤 사람으로 자랄지 알고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5. 에서와 야곱
시간이 흘러 리브가는 쌍둥이를 출산합니다. 쌍둥이 중에 첫째 아들은 몸에 털이 많고 피부가 붉어 에서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둘째 아이는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났다고 하여 발뒤꿈치를 잡은 자, 속이는 자라는 뜻의 야곱이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삶은 이름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이 두 쌍둥이가 자라 에서는 들에서 사냥하는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장막에 거하면서 집안일을 하는 서로 다른 경향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삭은 장남인 에서가 들에서 사냥감들의 고기를 좋아하여 에서를 더 사랑하고 리브가는 장막에 거하면서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야곱을 더 사랑합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창25:28)
후에 이삭과 리브가의 이 편애로 인하여 그 두 형제는 서로를 향해 죽이고자 하는 미움과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장자로 태어난 에서는 당연히 받게 될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면 몇분차이로 태어난 동생 야곱은 그 장자의 명분과 장자의 축복을 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창25:33-34)
하나님이 주시는 복도 그 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고, 복을 사모하는 사람에게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에서는 장자의 복을 가볍게 생각하는사람이었다면 야곱은 그 복을 바라며 살던 사람입니다.
6. 리브가와 야곱이 이삭을 속이다.
어느날 이삭이 나이가 들어 눈까지 보이지 않게 되자 이삭은 장남인 에서를 불러 이야기합니다.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게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창26:2-4)
하나님은 분명 에서와 야곱 중에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 이야기하였으나 이삭은 그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 어차피 장자로 태어나 장자의 복을 받는것이 당연하니 에서에게 복을 주겠다 합니다.
이삭은 육체적인 눈만 어두워진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도 어두워져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보지 못합니다.
이삭과 에서의 말을 들은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 에서인척 꾸며서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으라고 합니다.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염소 때에 가서 거기서 좋은 염소 새끼 두마리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그가 죽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창27:8-10)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창27:19)
리브가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한 것인지, 그저 자신이 더 사랑하는 아들 야곱에게 속여서라도 복을 주고 싶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리브가를 통하여 야곱이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고, 다시 리브가를 통해서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이 흘러가게 합니다.
확실한 것은 리브가의 방법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남을 속이면서 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거짓마져도 자신의 계획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분이십니다.
-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모든 것 안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강한 것과 약한 것이 모두 다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속임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하나님은 그 속임을 넘어가주시지 않습니다.
이삭을 속인 리브가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떠나보내고 자신이 죽을때가지 다시 만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장막에 거하던 사람 야곱은 이삭을 속이고 장자의 복을 받음으로 형 에서의 미움을 받아 도망하여 남의 집에서 종처럼 살아가면서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에 기도가 마쳐지기도 전에 나타난 지혜롭고 용기있던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여인인 리브가가 이삭의 집에 거하면서 아주 사소한 일까지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보고, 또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나 리브가를 통해서 야곱에게로 복이 흘러가게 하시는 것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삶은 좋은 나쁜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좋고 나쁨으로 판단하고 좋은 것들로만 채우려 하지만 하나님은 능히 나쁜 것을 통해서도 뜻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기억하고 눈앞의 이익과 좋음이 아닌 우리의 생각과 뜻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