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한교회 2020. 5. 30. 15:35

2020년 5월 29일(금)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에스더 6-10장

1. 어제 우리는 에스더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여인이었고 왕의 은혜를 불러일으키는 사랑스러운 여인임을 상고했습니다. 이에 비해서 하만은 어떤 사람인가?

“자기의 큰 영광과 자녀가 많은 것과 왕이 자기를 들어 왕의 모든 지방관이나 신하들보다 높인 것을 다 말하고”(에스더 5:11)

하만이 자랑했던 것은 세 가지입니다. “자기의 큰 영광(vast wealth)”입니다. 즉 방대한 부입니다. 두번째로는 “자녀가 많은 것”입니다. 하만에게는 10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에스더9:14). 10명의 아들마저 자신을 과시하고 높이는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명예’입니다. “왕이 자기를 들어 왕의 모든 지방관이나 신하들보다 높인 것을 다 말하고” 하만의 자랑의 중심에는 ‘자기’가 있습니다. 영어로 죄라는 단어는 ‘sin’입니다. 단어의 중앙에 sIn, ‘I(나)’가 있습니다.

2. 이미 궁전의 안뜰에서 왕이 에스더에게 금규를 내밀었습니다. 역사는 이미 전날 밤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만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왕이 하만에게 묻습니다.

“왕이 묻되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에스더 6:6a)

“하만이 심중에 이르되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자는 나 외에 누구리요? 하고 왕께 아뢰되 왕께서 사람을 존귀하게 하시려면 왕께서 입으시는 왕복과 왕께서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가져다가 그 왕복과 말을 왕의 신하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맡겨서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 하니라”(에스더 6:6b-9)

궁전 안뜰에서 왕이 에스더에게 금 규를 내민것을 알지 못한 하만은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물었을 때 하만은 ‘나 외에 누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왕이 하만에게 이르되 너는 네 말대로 속히 왕복과 말을 가져다가 대궐 문에 앉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에게 행하되 무릇 네가 말한 것에서 조금도 빠짐이 없이 하라.”(에스더6:10) 자기가 얻을 줄 알았던 영광이 오히려 모르드개에게 돌아갑니다. 그의 계획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모르드개는 다시 대궐 문으로 돌아오고 하만은 번뇌하여 머리를 싸고 급히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가 당한 모든 일을 그의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에게 말하매 그 중 지혜로운 자와 그의 아내 세레스가 이르되 모르드개가 과연 유다 사람의 후손이면 당신이 그 앞에서 굴욕을 당하기 시작하였으니 능히 그를 이기지 못하고 분명히 그 앞에 엎드러지리이다.”(에스더 6:12-13)

3. 이제 대세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그의 측근들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들어가기까지 인간의 준비와 하나님의 기회가 만나는 절묘한 타이밍이 있었습니다. 조금 앞으로 가서 보면, 그날 밤에 왕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왕은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책을 읽었습니다. 궁중의 역대일지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왕은 일지를 읽다가 하필 모르드개가 자기를 죽이려는 반란을 막아낸 사건을 읽게 된 것입니다.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을 지키던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 왕이 이르되 이 일에 대하여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 하니, 측근 신하들이 대답하되 ‘아무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에스더 6:2-3)

4. 왕은 자기의 생명을 구한 모르드개에 대한 후속조치가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뜰에 있느냐?’ 하니 마침 하만이 자기가 세운 나무에 모르드개를 달기를 왕에게 구하고자 하여 밖에 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왕이 부르자 하만은 왕이 내릴 상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착각하고, 왕과 같은 수준의 높은 영광을 요청했는데, 그 영광은 하만의 것이 아니었고, 자신의 적인 모르드개가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 안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한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간섭하시는 손길이 곳곳에서 만져집니다.

5. 에스더서에는 잔치가 20번이나 반복됩니다. ‘잔치’는 에스더서 이야기의 극적인 면을 살려줍니다. 이 잔치는 마지막 부림절의 잔치로 끝맺음 하며 이스라엘의 부림절의 유래를 극대화시킵니다. 그리고 에스더서는 하만과 모르드게 문학적형태인 교차대구법으로 그려냅니다. 1)3:10에는 왕이 하만에게 반지를 줍니다. 8:2에는 왕이 모르드게에게 반지를 줍니다. 2)3:12에는 하맘이 서기관을 소집합니다. 8:9에는 모르드게가 서기관을 소집합니다. 3)조서후에 왕의 반지로 인칩니다. 8:10 조서후에 왕의 반지로 인칩니다. 4)3:13 유다인들의 학살명령이 내려집니다. 8:11대적들의 학살명령이 내려집니다. 5)3:14 하만의 조서가 선포됩니다. 8:13모드드게의 조서가 법으로 선포됩니다. 6)3:15 역졸들이 급히 나갑니다. 8:14에도 같습니다. 7)3:15 수산성전체가 어수선합니다. 8:15 수사성 전체가 기뻐합니다. 8)4:1 모르드게가 굵은 베를 입고 재를 무릅씁니다. 8:15 모르드게가 왕실의 조복을 입습니다. 9)4:1 모르드게의 대성통곡이 나옵니다. 6:11 모르드게가 존귀하게 됩니다. 10)5:14 세레스(하만의 아내)의 충고가 나오고 6:13세레스의 예언이 나옵니다.

6. 에스더서의 절정은 반전에 있습니다. 에스더는 두번의 잔치를 여는데, 5장의 첫번째 잔치과 7장의 두번째 잔치 사이에 왕의 잠못이루는 밤이 있습니다. 6장에서는 모르드게도 에스더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스토리 전개는 보이지 않는 힘, 곧 하나님의 개입을 드러냅니다. 이제 두번째 잔치로 가서 걸어봅니다. 왕은 첫 번째 잔치 때와 마찬가지로 왕후 에스더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물었습니다.

“왕이 이 둘째 날 잔치에 술을 마실 때에 다시 에스더에게 물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에스더 7:2)

7. 에스더는 전날 왕이 소원을 물어보았을 때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명확하게 자신의 요구를 말합니다.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라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그래도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 하니”(에스더 7:3-4)

에스더는 침착하게 멸절의 위기에 처해있는 유다 민족의 비참한 현실을 알립니다. 에스더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과 자기의 생명과 자기 민족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청합니다. 하만의 계략으로 왕은 사랑하는 왕후, 에스더를 잃게 될 것이며, 국가 전반에 걸쳐 큰 도움이 되는 유다민족을 사라지게 하면 왕에게도 큰 손실을 입게 될 것임을 알렸습니다.

8.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말하여 이르되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에스더가 이르되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하니 하만이 왕과 왕후 앞에서 두려워하거늘”(에스더 7:5) 이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로부터 왕후와 그 민족을 진멸하려 하며 왕인 자신에게까지 큰 손해를 입히려는 사람이 가장 아꼈던 측근 하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극심한 분노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번뇌에 빠집니다.

“왕이 노하여 일어나서 잔치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 가니라.”(에스더 7:7a)

왕은 사랑하는 왕후와, 나라의 정사를 맡은 총애하던 총리 하만 사이에서 갈등하며 판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만은 판단력을 상실하였습니다. 기고만장하던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공포심에 사로잡힌 하만은 이 순간을 모면하고자 왕후 에스더에게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걸하며 왕후 에스더가 앉은 걸상 위에 올라가 엎드렸습니다. 뒷마당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면서 그 모습을 멀리에서 본 왕은 왕후를 겁탈 하려는 행동으로 보고 오해하였습니다. 왕은 극도로 분노하여 당장 하만을 처형하도록 명령합니다. 이성을 잃은 하만이 목숨을 구하겠다고 행동한 것이 자신의 죽음을 더 재촉하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왕을 모신 내시 중에 하르보나가 왕에게 아뢰되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이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이제 그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나이다. 왕이 이르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하매” (에스더 7:9) 내시들은 하만이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고 세운 나무를 기억하고 왕에게 고하였습니다. 결국 왕은 하만이 스스로 세운 장대에 그를 처형하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하만은 자기가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지게 되었습니다.“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죽겠고 심히 미련함으로 말미암아 혼미하게 되느니라”(잠언 5:22-23)

9. ‘나무에 매달리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상징입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명기 21:22-23) 예수님이 나무(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만은 자기의 죄의 댓가를 자기가 받았습니다. 모르드개가 달리도록 음모된 나무에 하만이 달려 죽습니다. 그리고 8장에 들어오면 하만의 모든 것이 에스더에게 주어집니다. 그것을 모르드개가 관리하게 됩니다. 또 전국 각 지방에 파발이 보내지는데, 그 이유는 하만의 권력과 조직이 페르시아 왕국 곳곳에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만의 권력과 조직이 일순간에 무너지고, 각 지방, 각 읍에서 유다인들의 잔치가 열립니다(에스더 8:17). 그리고 9장에서는 하만의 열 아들 모두가 죽게 됩니다. 이처럼 에스더서에서 하만이 가지고 있던 힘과 권력, 하만이 가지고 있는 자랑 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쓰러지고 그것이 그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것이 됩니다.

10. 이를 통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가장 쉬운 답은, ‘믿음과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 믿음으로 싸우면 승리한다’는 메세지 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메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다시 오실때까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정체성을 지키고 살아갈 때에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메세지입니다. 때로는 고난의 힘이 너무커서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그 승리를 위해서 모르드개에게 그러했듯이 우리의 애통과 통곡을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와 역사를 펼치시는데 우리 삶의 위치에서 신앙적인 반응과 우리의 행동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반응과 행동이 이 죄된 세상을 이기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죄된 세상에서 승리를 우리에게 주시는데,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우리의 신앙적인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과 역사는 우리의 신앙적인 반응과 행동과 맞물려서 나타납니다. 이것이 에스더서에 하나님이라는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편 23:4-5)

11. 에스더서는 구약 성경 중에 오세오경 다음으로 유대인들에게 많이 읽히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에스더서를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주변 민족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에스더야말로 수천 년 전 애굽에서 동족을 구원해 홍해의 기적을 연출한 모세를 연상시킬 정도로 위로와 용기를 선사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유다인들은 아달월 십사일을 명절로 삼아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그 날을 기념하여 큰 잔치를 베풉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주목해 볼만한 좀 특이한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더 9장에서 세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문장이 “그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에스더 9:10, 15, 16)는 기록입니다.

12. 아하수에로왕은 조서를 통해서 유다인들이 그들의 대적들을 죽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재산까지도 탈취해도 좋다고 허락을 했습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은 그들이 진멸한 대적들의 재산에는 결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왕이 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재산에 손을 대지 않은 이유는 재산을 탈취하고 부유케 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에스더서의 중심 줄거리는 모르드개와 하만의 갈등인데, 이것은 이스라엘과 아말렉 족속과의 지속적인 갈등을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모르드개는 베냐민 자손으로 사울의 아비인 기스의 후손이고, 하만은 아말렉 족속의 왕인 아각의 자손입니다. 이는 이미 출애굽부터 시작된 이스라엘과 아말렉간의 갈등의 연장이고,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게 된 사무엘상 15장 사건의 해결이 되는 셈입니다.

13. 전쟁을 하게 되면, 전쟁 후에 얻게 되는 전리품은 승자가 충분히 차지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사람들은 좋은 물건을 보면 탐심이 생겨서 그 물건을 갖고 싶어 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아말렉의 모든 사람들과 가축들까지도 전부 죽이라고 명령을 하셨지만, 사울왕은 탐심으로 아각왕을 살려주고,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은 남겨두었고, 그 불순종으로 인해서 사울왕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게 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모르드개 당시 유다인들은 아말렉인들에게서 재물을 탈취하기에 급급했던 사울의 잘못(사무엘상 15:9-19)을 반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한 것입니다.

14. 극심한 공포 속에 구원을 받은 민족을 향해 모르드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에스더 9:22) 이렇게 시작된 절기가 부림절입니다(에스더 9:24-26).

15. 부림절은 ‘부르’라는 단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부르'는 '주사위'인데, 하만이 유대인들을 몰살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는 말, 즉 주사위를 던져 날짜를 지정했다는 사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결국, 반드시 죽음의 날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생명의 날로 탈바꿈시켜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 날을 기념하라(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념합니까? 모르드개는 부림절을 재정하며, 평안과 기쁨과 길한 날이니 마음껏 누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명합니다. 복음은 혼자만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아무리 깨끗한 물도 담아두면 썩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물이 썩지 않는 방법은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복음도 흘려보내지 않으면 이내 혼탁해지고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모르드개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살아도 충분한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민족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드라마틱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신을 위해 권력과 재능을 이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자신의 민족을 위해 흘려보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속에 갇혀 계신 분, 나만의 전유물로 끝나는 분이 아니라 내 주변으로 흘려보낼 때 비로소 하나님의 본 모습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