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0-57편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시편 50-57편
1. 시편 54편은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라는 긴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는 사무엘상 23-26장을 배경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의 목숨을 위협하며 추적하고, 다윗은 계속 도망다니면서 숨습니다. 그때마다 일어나는 일은 사울 측의 사람들이 다윗이 어디에 숨어있다고 고발을 했습니다.
2. 그런데 그 현장이 ‘십’ 광야입니다. ‘십’은 ‘제련소’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세가지 패턴이 계속 돌아갑니다. 고발을 하고, 도망을 가고, 추적을 하고 입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참 인생이 괴롭고 슬퍼집니다. 그것도 누가 고발을 해서 들키면 마음이 매우 괴롭습니다. 이 도망자의 고달픔은 육신만의 고달픔 만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이 피폐해집니다. 시편 54편은 그 속에서 다윗이 쓴 시입니다. 그런 배경을 가지고 본문을 보면 단어와 문장 속에서 다윗의 느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다윗의 마스길이라는 말은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시편 54:1)
다윗은 “구원하시고… 변호하소서” 라고 합니다. 지금 다윗은 계속 쫒겨 다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쫒겨다니면 혼한 스러운 심정이 생겨납니다. 나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사울은 누구인가? 그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이런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다윗이 나를 ‘변호해 달라’는 이야기는 나를 ‘판단해 달라’는 뜻입니다.
4. 이런 생의 탄원을 가슴에 품었을 때, 그것을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가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방식과 가치관으로 풀어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시편 54:2) 라는 말씀이 보여주 듯이, 다윗은 이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5. 탄원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인생은 억울한게 많습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세상의 방식으로 푸는가?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느냐?의 문제입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6b)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누구나 고통 속에서 기도의 자리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의 자리로 가는 것은, 고통과 문제 속에서 그것을 끌고 하나님께로 나가는 것이 습관이 되고 체질이 되도록 연습해야 되어집니다.
6. “낮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시편 54:3)
이 말씀이 다윗의 탄원의 내용입니다. ‘낮선 자들’은 처음 보는 사람이나 잘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낮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라는 말은 인간적인 친밀함을 척도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들면 친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잘 아는데 영(고백)이 다르면 맨 끝에 가서 ‘낮섭니다’.
그러므로 ‘낮선 자들’이라는 표현은 근본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늘 낮선 자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자주 만나도 고백이 다르면 낮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그래서 이 낮선 자는 하나님을 고백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끝이 납니다. 영이 다르면 고백이 다르고, 마지막에는 가는 길이 다른 것입니다.
7. (셀라)
시편에서 매우 익숙한 단어가 3절의 마지막에 써있습니다. 셀라는 성경을 읽을 때 안 읽어도 되는 부분입니다. 음악으로 숨표 부호같은 것입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숨표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숨표’이렇게 찬송하지 않지요. 셀라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셀라를 표기차원에서 써놓았는데 무려 77번 쓰여있습니다. 그 중에 74번에 시편에 나오고, 3번이 하박국에 나옵니다. 이 셀라가 77번 쓰였다면 이것은 부호이지만 가볍지 않다는 것입니다.
8. ‘셀라’는 쉼표입니다. 이 셀라는 안읽어도 되지만, 이것이 표기된 이유는 문장이나 시에서 그 의미를 되살리고, 다시한번 깊이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셀라는 앞의 의미를 우려내고 드러내고자 하는 기능입니다. 시편 54편의 3절까지는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탄원입니다. 그런데 4절부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사이에 ‘셀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셀라는 가장 보편적으로 음악부호의 ‘쉼표’ 역할을 합니다. 쉼표는 앞 뒤의 리듬과 음과 가사를 분명하게 전달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곧 호흡을 잘하면 메세지가 분명해 집니다. 또 하나는 어떤 대목에서 강조하기 위해 높이는 때입니다. 예를들면 노래를 부르다가 클라이막스에서 뚝!하고 멈추는 것입니다. 긴장감, 내용이 담은 메세지를 그 멈추는 시간에 붙잡고 있는 역할이 셀라입니다.
9. 이러한 셀라의 기능은 마치 ‘예배’와 같습니다.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삶의 예배를 드리다가, 공예배를 통해서 ‘셀라’하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셀라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셀라의 영역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셀라의 시간에 앞뒤를 돌아보고, 늘어진 줄에 텐션을 주어 튜닝(조율)을 하고, 다시 중심을 잡습니다.
10. 다윗은 어쩌면 전에 왕궁에서 마주쳤던 사람들, 그러나 본질이 다른 낮선 자들의 고발 속에서 ‘셀라’하고, 4절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편 54:4)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시편 54:6)
11. 여기 ‘낙헌제’로 주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여기 낙(樂)은 즐겁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즐거움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으로 율법의 규정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닌, 자유로운 제사로서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제사가 낙헌제입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 속에서 영적인 감격과 희열이 넘쳐나오는데 그렇게 드리는 제사가 낙헌제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낙헌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셀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