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의 시작은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도 역시 족보로 시작하지만
마태는 한 가지 다른 점을 주목합니다.
바로 6절까지 등장하는 4명의 여자들을
족보에 넣었다는 것이죠.
우리나라의 족보에도 여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남자입니다. 유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여자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무려 이천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말이죠
역시 성경은 현대적인가요?
이 글을 쓴 것은 마태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심입니다.
2. 첫 번째 등장하는 여인은 누구인가요?
다말입니다.
다말은 요셉을 팔았던 형 유다의 며느리인데
유다에게서 베레스를 낳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일까요?
여전히 성경이 현대화인가요?
며느리가 시아버지 사이에서 아이라니 왜 그랬을까?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다말은 유다의 첫 아들과 결혼하지만
아이를 낳기 전에 남편이 죽어 둘째와 다시 결혼했는데
둘째아들도 죽어 아직 어린 셋째만 남게 되자
유다는 혹시 막내도 죽을까봐
다말에게 막내가 다 클 때까지 기다려라 하고는
시간이 흘러도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자 다말은 창녀로 위장해서 유다와 동침하고
아이를 가집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식이 없는 과부는
지위도 없고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입니다.
다말은 자기가 살기위한 몸부림을 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떳떳한 일이 아닙니다.
3. 이 족보에는 나오지 않지만 한 여인이 더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아내이며 이삭의 어머니인 사라입니다.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었습니다.
그래서 원하지 않지만 선택을 한 것이
자신의 여종 하갈과 아브라함이 동침하게 하여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보게 하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는 뒷방 늙은이로 전락해
슬픔의 시간을 보냅니다.
자신이 한 결정이지만 그로 인해 스스로 고통받는
그 사라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 내년에 아들 낳을 거야!"
그 말을 들은 사라는 웃습니다.
그런데 그게 진짜 웃음인가요?
어이없는 웃음, 슬픔의 웃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 웃었다?"
하나님이 그 웃음 속의 슬픔을 몰라서 그런가요?
아니요 그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 슬픔 가운데서
긍정적인 요소를 찾아냅니다.
그리고 사라가 그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에게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
정말로 아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이에게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슬픔 가득했던 그 자조적인 웃음이
정말로 기쁨의 웃음이 되게 하셨습니다.
믿음에는 이처럼 긍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4. 최근 들어서 올림픽 선수들의 태도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바로 enjoy입니다.
예전의 시대는 헝그리 정신으로 죽기 살기로 했다면
이번에는 웃음이 눈에 띕니다.
양궁에서 3점을 쐈는데 피식 웃어버립니다.
어떤 중국 수영선수는 자신이 메달 딴 것에 이미 족하다고 기뻐합니다.
그 모습이 너무 천진난만해서 여기저기 영상도
떠돌아 다닙니다.
우리의 고난 가운데 기도하고,
철야하고 금식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놓은 영적인 태도는
바로 웃는 겁니다.
즐기세요.
하나님을 믿고 잃은 것보다
얻을 것이 더 있음을 믿으세요.
믿음에는 긍정적인 요소와
행동적인 요소가 함께 따라가야 합니다.
5. 두 번째로 등장하는 여인은
여리고에 살던 기생 라합입니다.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주면서
그들과 함께하기를 바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정탐꾼 중 하나인 살몬과
결혼하지만 그 여인이 이방여자고 기생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6. 세 번째로 등장하는 여자는 룻입니다.
이 여자도 역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원래는 다른 사람의 부인이었다가 남편이 죽고
이스라엘 사람이었던 시어머니랑 같이
남편의 고향으로 돌아와
기생 라합의 아들인 보아스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룻은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7. 네 번째 등장하는 여자는 밧세바입니다.
밧세바는 다윗에게서 솔로몬을 낳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가 아니라
헷사람 우리야의 아내라고 합니다.
네 맞습니다. 이 여자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남편이 있는데 다윗왕과 동침하여 아이를 낳은
불륜을 저지르고 다윗왕이 그 죄를 감추려고
남편을 죽이려 할 때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내버려둔 자기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지 않고
바람 핀 그 여자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간 것은
마태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태는 이 밧세바를 좋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윗의 아내로 인정하지 않았잖아요.
여기 등장하는 여자들이 떳떳한가요?
8. 이 족보에 등장한 떳떳하지 않은 여인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틀림없습니다.
창녀고, 두 번씩 결혼하고, 자기 남편을 배신한
이 여인들 그 상황이 어쨌든 간에
그들은 결코 떳떳하지 않은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누가 이들을 인정합니까?
마태도 인정하지 않는 과거를 가진 이들의 그
속깊은 사정을 하나님이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넣어주면서
인정했다는 겁니다.
9. 그 인정하심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고 능력입니다.
어떤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게 가서
혼내고 잔소리 하면 변할 거 같나요?
아니요. 더 철저하고 계획합니다.
그런데 그 잘못한 사실을 그냥 인정해주면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아요. 니 죄는 니가 알렸다!
지가 알아요.
그리고 자신을 인정해준 그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에 스스로 변화해나갑니다.
엇나가는 불량청소년들은
자신의 죄를 지적할 사람보다 그 모습을,
그렇게 되어가는 자신을 인정하고 알아줄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떠나 창녀들에게 다 써버린
그 탕자에게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인정해버립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사는 사람도 남편이 아닌 그 사마리아여인을
예수님은 인정합니다.
간음죄로 잡혀와 있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이제는 죄를 짓지 말라고
그 전의 모습들 모두 인정합니다.
10. 우리 가운데 이 여인들의 과거보다
낫다고 할 사람이 있나요?
정말로 우리의 모든 과거를 드러내 놓고도
낫다고 할 수 있나요?
이 여자들의 그 과거를, 결점을 인정한 것처럼
우리의 잘못도 인정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이유입니다.
내가 그 너희 잘못들을 대신 그 십자가에서
다 못 박았다. 십자가 위에서 인정해버렸습니다.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하나님은 스스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내려와서
죽기까지 우리를 인정하고 사랑했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사랑을 의심하고 의심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아닌데 왜 사랑할까
의심이 마음속에서 자라고 그 사랑이 믿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신이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넘어서
그 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믿겨야 진짜 믿음으로 변하고 내
삶의 변하는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사람은 단 하루만에 믿겨질 수도 있고
10년이 걸릴수도 있고, 평생이 걸릴수도 있습니다.
평생이 걸렸다고 그 인생이,
그 믿음이 실패한 믿음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 평생의 삶을 돌아보면 믿어지지 않을 때도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더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힘을 내길 바랍니다.
지금 믿기지 않아도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사랑받을만한 존재가
아닌 것 같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무목사 메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