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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미니스트리

사무엘하 17-20장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사무엘하 17-20장, 세족목요일

1. 오늘은 다윗과 요압, 그리고 밧세바의 역학관계라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봅니다.

사무엘하 18장에서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되고 압살롬이 죽게 됩니다. 다윗은 부하들에게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요압은 그 말을 듣지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압살롬은 죽고(사무엘하 18:1-18), 다윗은 슬프게 웁니다(사무엘하 18:19-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사무엘하 18:33)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사무엘하 19:4)

2.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을까요? 그의 아들 암논이 다말 사건을 일으키고, 압살롬이 복수로 암논을 죽이고, 그 압살롬은 쫓겨나게 되고, 그가 오랜 시간 후에 돌아와서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고 반역을 준비했습니다. 그 중에 아히도벨이 그의 책사가 되고, 아버지의 후궁을 취하여 아버지의 수치를 드러내고, 다윗은 피난길에 시므이의 저주를 받고 하는 압살롬의 반역에 대해서 다윗은 왕권의 싸움이 아닌 아버지의 마음으로 압살롬을 아끼는 고통을 쏟아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권력 투쟁의 이해관계에 묶여있는 요압에 의해서 죽게 됩니다.

가장 좋은 그림은 다윗이 왕이 되고, 권력과 영광의 정점에서 하나님께 성전 짓겠다고 서원한 날 심장마비로 죽는 그림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오묘하여 다윗은 밧세바 사건을 시작으로 바닥이 보이지 않는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상기한 다윗의 아들에 대한 반복되는 애통은 다만 아들의 죽음 만이 아니라, 자기 인생 전체에 대한 절망으로 보아야 됩니다.

3. 성경에서 다윗의 다른 이름은 ‘은혜’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밧세바 사건에 대해서 다윗은 분명히 회개했습니다(시편 51편). 그러나 은혜를 받은 깔끔한 결론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은혜가 무엇이지?라고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이게뭐냐면, 은혜는 받았지만 이해는 틀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한문장으로 만들어냅니다. 이런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가 잘못해서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은 은혜를 받은 것이고 뒤는 이해에서 틀리는 것입니다.

4. 우리는 은혜를 생각할 때, 그 은혜가 무엇인가? 보다, 은혜가 어떻게 우리에게 보상되었는가?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가 어디까지 담기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을 때, 우리가 절망하고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리까지 은혜가 담깁니다. 사람들은 은혜가 어디까지 들어왔는지를 모르고, 자기가 은혜를 받은 만한 자리에 들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밧세바 사건으로 깨진 것입니다.

솔직이 우리는 다윗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전 역사를 통해 다윗보다 나은 사람은 하나 있을까 말까 합니다. 그의 영웅성으로 비교해도 그보다 나을 수 없고, 그의 죄인 된,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우리의 무지는 인간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 17:3)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최선을 들어주시는 능력자임을 말하지만, 그분이 나에게 어떤 목적을 두셨는지에 대해서 무식합니다. 이게 참 신묘하고 이상한 것은, 세상에서 공부 잘하는 사람이 이걸 더 모른다는 것입니다. 목적은 자기가 정하고, 능력만 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자들이 참 많습니다.

5. 우리는 끝없이 도덕과 윤리와 유용성에서, 그리고 승리와 영광에서 최선의 경지에 서려고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오셔서 꺽으십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것을 꺽으신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심과 특심한 열심이 예수님을 죽입니다. 바울이 스데반을 죽입니다. 제자들은 도망칩니다. 거기서 거기.

우리의 실력이 어느정도냐면, 주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사랑타령이 시작됩니다. 사랑이 무기가 됩니다. ‘너 왜 사랑안해?’,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어!’ 이런게 사랑을 무기로 심판하고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력입니다. 세상의 가치로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으며, 그것을 흉내 내더라도 결국은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은 ‘다른 세계의 것’입니다. 놀랍죠. 바로 그 다른 세계의 가치가 다윗의 후반전에 드러납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담아내는 것이 담겨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최선을 담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담으십니다. 이것이 밧세바 사건 이후의 다윗의 생애입니다. 그 다윗의 후반전을 우리 역시 피해갈 수 없습니다! 이 은혜가 어떻게 담기는지 마태복음 1장에서부터 드러납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태 1:6)

이 창피 무쌍한 선언의 자리, 거기에 예수님이 오십니다(담기십니다). 그 자리가 십자가의 은혜가 주어진 자리입니다. 거기서 다윗은 민망하게 그리고 고맙게 서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 바로 이것이 우리의 가치이고, 영광이 되는 겁니다.

6. 이제 요압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압살롬의 반역이 끝나고 다윗은 세바의 반역앞에 서게 됩니다. 세바는 사울이 속했던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다윗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입니다. 이 세바의 반역에 남은 지파들이 합세함으로 큰 문제가 됩니다. 이 쿠(coup)의 성격상, 다윗은 유다지파에게 기댈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일을 아마사에게 맡깁니다. 그런데 이게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아마사는 압살롬이 반역해서 세운 그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왜 다윗은 이렇게 중요한 일에 요압을 세우지 않고 아마사를 세웠을까?

아니나 다를까 요압에 쫓아가서 인사하는 체 하며 칼로 아마사의 배를 찔러 죽입니다(사무엘하 20:9-10).

왜 다윗은 아마사를 세웠을까? 다른 편으로 보면 요압을 세우지 않았을까? 요압이 압살롬을 죽였습니다. 같은 편에 있어도 보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이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7. 오늘 우리가 걷는 사무엘하 20장에 보면 요압은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의 지휘관이 됩니다(사무엘하 20:23). 이것을 누가 임명합니까? 왕이, 곧 다윗이 임명한 것입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의 시작이 바로 밧세바 사건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얘기입니다.

다윗이 요압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밧세바의 남편되는 우리야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격렬한 전투지로 보내서 그를 앞세워서 죽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야가 죽습니다.

8. 그때부터 요압은 다윗의 약점을 쥐고 있는 사람이 됩니다. 다윗에게는 요압이 필요했다가, 민망했다가, 겁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압살롬의 반역 때, 다윗은 분명히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른 장군들은 압살롬을 죽이지 못하는데 누가 죽였습니까? 바로 요압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애곡합니다.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면서 울면서 애곡했습니다. 바로 그 장면에서 요압이 다윗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9.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 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 하였나이다.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하니,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어떤 사람이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신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사무엘하 19:5-8)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바로 이게 요압의 협박이죠. 이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서 다윗이 백성 앞으로 나옵니다. 지금 다윗은 자신이 원치 않는 길에 서있는 것입니다.

10. 다윗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골리앗 앞에서 위풍당당하여 골리앗을 물리친 사람이었습니다. 그 용감함과 영웅적 은사가 이렇게 허무하게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는 지금 민망하고, 답답하고, 부끄러운 인고의 자리에 처한 것입니다. 왜요? 신앙이 좋아서 없어진 것이 아니라 밧세바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의 인생이 능동태에서 수동태로 끌려옵니다. 바로 이것이 다윗과 밧세바 그리고 요압의 역학관계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옷을 깨끗하게 빨아서 하얘지는 것이 아니라, 새 옷을 입혀주는 것입니다. 그 옷을 입은 사람이 멋져지도록 만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 멋져진 모습이 세상에서 힘있는 자가 되거나 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성품이 그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겸손해지고, 용서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할말이 없는 인생을 감수하면서 만들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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