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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0-13장
신명기 10장은 모세가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 판을 [다시] 받아 궤에 넣는 사건을 이야기한다(출애굽기 34:1-10).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신명기 10:5)
상기한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첫번째 돌 판이 깨어졌지만, 같은 내용의 두번째 돌 판을 주시고 그것을 궤에 넣어 보관하게 하셨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은 조정이나 양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로우심’은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이며,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이 좋은 의가 죄인에게 적용되면 심판이 된다. 죄인이 심판을 받지 않고 살아나려면 사랑이 필요하다. 의와 사랑은 다 아름다운 것인데, 이 두가지가 함께하지 못한다. 의가 적용되면 죽어야 하는데, 그 죽어야 하는 사람을 살리는 사랑이 적용되면 의가 희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모세가 지금 가나안 세대에게 설교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었는지를 설교했다. 하나님께서 죽어야 할 사람을 먼저 살리셨고, 그들에게 의롭게 살도록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서로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서로 만난 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죽이심으로 공의로우심을 나타내셨고,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심으로 사랑을 이루셨다. 당신의 [공의로우심]과 [사랑]이 요구하는 것을 십자가에서 완전히 이루시고 채우셨다. 이것이 [대속]이 품고 있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되,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의 값을 받으심으로 죄의 족보는 끝이 났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새 생명의 족보의 기원, 곧 두번째 아담이 되시는 것이다.
모세가 두번째 돌 판을 궤에 넣었다고 설교하고, 이어서 제사장 아론의 죽음을 언급하는데 그 아론의 직임을 엘르아살이 이어 받았다고 기록한다.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통로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의 통로가 제사장으로 아론이 죽은 후에 그 제사장의 직임을 그의 아들이 이어 받았다는 모세의 설교는 중보의 길,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길이 열려진 것]을 품고 있는 내용이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명기 10:12-13)
여기 까지를 정리해 보자.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 그 하나님은 제사장을 통하여 우리를 축복하신다. ->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우리도 그 하나님을 기뻐한다.
그래서 신명기 10장의 후반부의 내용은 네가 이렇게 복된 존재이니 이제 규모 있게 살라는 내용이다. 모세의 설교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신명기 11:1)
모세는 사랑이 근거가 된 내용들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 그 사랑이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이 신명기 11장에 흐르는데, 그 내용으로 지금까지 하나님이 하신 역사를 다시 회고한다. 그것은 [애굽에서부터 여기까지]이다. 모세는 그것을 마음과 뜻에 두고,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문설주 밑 바깥 문까지 기록하라고 한다(신명기 11:1-20). 결코 잊지 말라는 것이다. 올챙이적 때를 잊지 말라.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살라. 그 사랑을 한시도 놓지 말고 살라고 한다.
12장으로 오면, 모세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주신 율례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적용되는 모습들, 곧 예배가 무엇이고… 헌금을 드리는 것이 무엇이고… 이런 내용들을 설교한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드리는 예배는 그 위치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이다. 그곳에 들어갔다. 그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가나안 예배는 [무엇을 받는 조건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것에 대한 예배]이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이 축복이다.
거기에 가서 번제와 희생과 십일조와 거제와 서원물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라고 하신다(12:11-12).
평생 자기 만을 위해 소비하며 살던 사람이, 이제 드리고, 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복이다. 복을 달라는 자리에서 복을 주는 자리로 간 것이다. 그것이 기쁜 것이다.
율법이 요구하는 책임은 의무나 조건이 아니라, 특권으로 부르시고 복을 주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부요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우리의 모습은 저절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게 된다. 거기에 거룩하신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 자비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드러나게 된다.
가나안의 위치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이며 이제 그곳에 들어가게 된다. 그 약속의 땅에서 드리는 예배의 특징은 무엇을 받는 조건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것에 대한 예배이다. -> 거기에 가서 번제와 희생과 십일조와 거제와 서원물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라고 하신다(12:11-12).
광야 신자의 특징은 불평 -> 원망 -> 불순종이다. 이 모든 것의 본질은 자기 중심성이다. 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는 씨를 뿌릴 수 없다. 그래서 만나가 내렸다. 그러나 가나안에서는 땅이 주어진다. 그래서 만나가 멈추었다. 거기서 성도는 씨를 뿌리고 노력하며 열매를 수확한다.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광야 신자의 싸움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고, 가나안 신자의 싸움은 가치관과 책임을 지키는 싸움이다.
[기도]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You are not to do as we do here today, everyone as he sees fit. (신명기 12:8)
내 자신의 이기심이 극복되고, 생명을 살라고 돌보는 일이 나에게 더욱 가치 있는 일이 되게 하옵소서. 씨를 뿌리고 땀을 흘려 일할 수 있는 것이 큰 행복임을 고백하며, 살아 있는 모든 날의 수고를 가치 있게 해 주옵소서. 신자 된 책임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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