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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미니스트리/2024 말씀을 걷다

2024 말씀을 걷다 신명기 26-29장

신명기 26-29장

신명기 26장의 시작에는 [토지 소산]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에서 토지의 모든 소산을 거두었을 때,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아 하나님 앞으로 나가라고 한다(신명기 26:1-2). 그리고 이어서 제사장 앞에서 이렇게 말하라고 한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신명기 26:3)

그러면 제사장은 그 광주리를 가져다가 제단 앞에 놓아야 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하라고 한다.

“…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신명기 26:5-10)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거둔 [토지 소산]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감사를 드리는 장면이지? 그들이 드린 감사의 내용을 보면, 그들이 토지 소산을 가지고 와서 감사를 드렸지만, 드린 감사의 내용은 토지 소산이 아니라 [가나안 땅]이다.

이런 이야기이다. 십일조를 드릴 때, 그 십일조 자체가 감사가 아니라, 그것을 드릴 수 있도록 수고하여 일하고, 노동을 하게 하신 것을 감사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가나안의 축복이다.

땅이 없으면 수확을 거둘 수 없다. 광야는 지나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씨를 뿌릴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나를 주셨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자 만나는 그쳤다. 그 대신에 땅이 주어졌다. 그곳에 씨를 뿌릴 수 있고, 땀을 흘려 노동할 수 있으며, 그 열매를 거둘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씨를 뿌리고 수고하고 노동하여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이 가나안 땅의 축복이며 그것으로 감사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축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성경의 가치관을 드러낸다. ‘씨를 뿌리고 노동하고 수고하여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와 왔다는 근본적인 복이 기초가 되어 있는 것이다.

신명기 26:12에는 셋째 해에 드리는 십일조가 기록되어 있다. 셋째 해라는 뜻은 당연하게 그 앞에 첫째와 둘째 해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십일조는 문자적으로 1/10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든 수확의 근거가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있으므로, 곧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 왔기 때문에 가능해 진 것으로, [전부]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고백이 된다. ‘지금 내가 씨를 뿌리고 노동을 하고 땀을 흘리고 열매를 거두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왔기 때문에 되어진 것입니다’라는 고백이다.

이렇게 십일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그런데 셋째 곧 세번 째 해의 십일조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그들로 그것을 먹고 배부르게 하라고 한다(신명기 26:12). 그들이 나누어 주는 대상은 스스로 거둘 수 없는 사람들이다. 레위인은 자기 기업이 없는 사람이고 객은 자기 땅이 없으므로 거둘 수 없고, 고아와 과부는 기업이 없어진 사람이다. 그들을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구분되지 않는다.

특별히 구제의 대상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먹이지 못하는 사람]으로 그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은혜를 입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가나안에서 수고하여 얻은 것을 어려운 자들을 구제하는데 사용 함으로, 주는 사람도 스스로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과,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하고 고백하는 것이 된다.

신명기 27장이 시작되는 제목은 [돌 위에 기록한 율법]이다. 이렇게 계속 율법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지키라는 말씀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내용을 품고 있다. 이 신명기 27장에서 한 모세의 설교는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이행된다(여호수아 8:30-35)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대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신명기 27:12-13)

앞에 여섯 지파는 야곱이 레아와 라헬에게서 난 자손들이고, 뒤에 여섯 지파는 시녀들에게서 난 자손들이다. 축복과 저주라는 단어가 나오기 때문에 무슨 뜻인가? 라는 생각이 들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은 모두가 이스라엘의 지파이다. 레아와 라헬 쪽은 축복을 받는 쪽이고, 시녀들 쪽은 저주를 받는 쪽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오해 한 것이다.

여섯 지파 씩 둘로 나누어서 한 쪽은 그리심 산에 세우고, 다른 쪽은 에발 산에 세운 것, 다시 말하면 한 쪽은 축복을 다른 한 쪽은 저주를 상징하는 것은, [율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축복과 저주로 나누어 집니다(여호수아 8:34). 율법이 축복과 저주로 나누어 지는 것은, 그것이 ‘옳고 그름의 척도가 된다’는 뜻이다. -> 그러므로 이렇게 풀어 가질 수 있다. 율법 앞에서는 [옳든지] 아니면 [잘못되었든지] 이다. 중간은 없다.

이스라엘이 율법 앞에서 잘못했다. 그러면 저주 쪽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율법을 주셨을까? 율법의 중요한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왜 죄를 깨닫게 할까? 1)죽이려고, 2)살리려고… 2번이다. [살리려고] 이다. 이렇게 살리려는 것이 율법이 가지고 있는 저주의 기능이다.

그러면 나머지 반쪽인 축복의 기능은 무엇일까? 율법이 가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라나는 것이다. 이것이 여섯 지파 씩 나누어서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 세운 것, 축복과 저주를 선포한 사건이 가진 내용이다.

[기도]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He brought us to this place and gave us this land, 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 (신명기 26:9)

우리에게 주신 삶을 기업을 건강하게 일구어 살 수 있게 힘과 지혜와 바른 가치관이 되어 주옵소서. 셋째 해의 십일조를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베풀라는 말씀을 듣 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재물, 지식, 능력의 은사를 사용하여 땅에 심고 영원한 것을 거두게 하옵소서. 오늘도 고통 당하는 이웃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의 생명 사랑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도록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