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열왕기하 21-25장
1.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열왕기하 23:25)
요시야 왕은 열왕기 역사상 가장 분명하고 정직한 종교개혁을 시행한 왕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크게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열왕기하 23:26) 그리고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열왕기하 23:27하)고 하십니다.
2. 요시야는 다윗 이후 최고의 선한 왕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많은 개혁을 이룬 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에 이어 남유다를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남유다의 멸망이 요시야 한 사람의 열심으로 회복될 수 없는, 모든 국민과 국가의 총체적 우상숭배의 부패와 극심한 형편에 처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이사야 1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이사야 1:10-20). 이사야 선지자의 지적은, 신앙을 개인체험의 영역에 묶어두지 말고, 사회적인 책임까지 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수한 재물을 나에게 가져왔느냐? 분향을 했느냐? 월삭과 정한 절기를 지켰느냐? 그러면 악한 행실을 버리고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변호하느냐?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개인의 영성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이 몸담고 있는 사회, 삶의 자리에서 적용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원인입니다.
3. 이것은 신앙의 무게중심을 사회정의로 옮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개인의 신앙이 그가 속한 사회 속에서 ‘책임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정치적인 책임을 지라는 것이 아니고, ‘신앙적인 책임을 사회와 국가에 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으로 세워진 나라가, 그 나라가 세워지고 유지되기 위한 기준이 없어졌을 때, 그 나라가 존속될 이유가 없다라는 선고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어떤 힘이나 정당을 가져서 사회와 국가에 기독교 신앙을 강요하여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자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나라가 흔들리고 사회가 요동쳐도 기독교 신앙을 가진 우리가 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흔들림이 없다면 하나님은 그 나라와 사회를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4. 요시야의 개혁은 실패로 끝나고, 그 아들 여호아하스, 그 다음에 여호야김, 그리고 여호야긴 그리고 시드기야에 이르기까지 계속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을 거스리다가 결국은 바벨론에게 멸망당합니다.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는 자기가 보는 앞에서 두 아들이 죽고 두 눈이 뽑히고,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이 열왕기서의 마자막 장면은 유다의 멸망이 얼마나 처참하고 철저하게 멸망이 이루어졌는가를 기록합니다. 성전도 파괴되고, 성전안에 있는 모든 도구들, 심지어 기둥들 까지 바벨론으로 약탈당해 갔습니다. 뿐만아니라 지도자들은 모두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고 국민들은 여러나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이 열왕기서를 읽는 첫번째 독자(원독자)가 바로 바벨론에 포로가 되고 열국에 흩어진 망한 이스라엘 백성들로서, 이 말씀을 보면서 그들의 멸망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바벨론의 최소한의 보호마저도 끊어지는 유다의 비참한 모습을 열왕기서의 마지막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5.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그 백성이 자기의 백성임을 약속하셨고 기꺼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기를 허락하셨고, 그들의 예배를 받으시고, 다윗의 왕권이 영원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훼파되었고, 다윗의 후손들은 모두 적국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열왕기하의 마지막 부분에 이 문제에 대한 답이 주어집니다.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년 곧 바벨론의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달 이십 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하고, 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그의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그가 쓸 것을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양이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열왕기하 25:27-30)
6. 잡혀간 맨 마지막의 왕은 시드기야지만 시드기야는 여호야긴의 삼촌입니다. 연대기적으로 보면(연배) 여호야긴이 맨 끝 왕이 됩니다. 여호야긴이 왕의 명예를 회복받습니다. 열왕기의 마지막 후기는 포로된 이스라엘에게 묘한 희망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 여호야긴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한 왕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명예가 회복되는 장면이 열왕기서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벌을 받고, 멸망해야 함이 마땅한 그에게 회복이 주어집니다. 이 회복은 ‘은혜의 법’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데 주어진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가를 역사적 사건을 통해 메세지로 주셨습니다.
7.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목적하시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목적하는 것과의 갈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는다는 것의 심각성과 깊이를 우리가 깨닫는데 너무나 오래 걸립니다. 오늘 우리도 이 문제를 깊이 상고해야 할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에게 원하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내 소원과 기대의 대상이지, 순종하고 무릎을 꿇은 신앙에 대해서는 어느 시대나 싸움이 치열합니다.
8. 우리가 이 싸움 속에서 실패를 보는데, 이 실패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곧 하나님이 이렇게 철저하게 이스라엘을 끝내버리시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가지는 목적과 뜻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크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끝까지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들은 성전을 지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사를 지냈어도, 그것이 하나님이 목적하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그들에 대한 심판으로 증명되었습니다.
9. 이러한 희망 없음에서 여호야긴의 복권이나 다윗에게 하신 약속까지 포함해서 어떤 희망의 근거를 가져야 하는가? 는 이스라엘과 오늘 우리들에게 어떻게 믿음이 될 수 있는가? 이제 공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넘어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변명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이 ‘어떤 마음 가지시느냐?’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시느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에 달려 있습니다.
10. 구약 내내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속에서 책임과 성실함에서 하나님이 잘못하시는 적이 없습니다. 늘 이스라엘이 실패합니다. 늘 우리가 실패합니다. 이 실패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느냐의 문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편 103:8)
우리가 어느 자리 어떤 절망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근거, 기초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가에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열왕기서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결국적인 멸망으로 인해서, 그것이 절망인가? 아니면 희망을 말하자는 것인가?에서, 만일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근거하여야만 하는, 자리에까지 우리를 몰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며, 기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에 희망이 있어야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와 근거입니다. 신자 인생의 고단함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소원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데에 도달하기까지 우리 안에서 허다한 우상들이 뿌리 뽑히기까지 인생은 고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격(class)이 이루어지기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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