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시편 35-41편
1. 어느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희망을 걸고 공부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한 녀석이 엉뚱한 짓을 합니다. 배우라는 것은 안배우고 이상한 것만 배우고 옵니다. 처음에는 개소리를 배워오고, 그 다음에는 개구리 소리를 배워 왔습니다. 세번째는 새소리를 배워왔습니다. 화가 난 아버지는 너같은 아들 안둔걸로 하겠다고 하고 내쫒았습니다. 아들은 작은 짐을 꾸려서 길을 나섰습니다. 아들은 길을 가다가 가다가 해질녁에 음산한 성을 만났습니다. 아들은 그곳에서 하룻 밤을 묵으려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인 듯한 한 사람이 나오는데 그 사람의 모습도 음산했습니다. 그런데 안쪽에서 아주 사나운 개짖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젊은이 왜 문을 두드렸소?”
“네 제가 길을 가다가 밤을 만났습니다. 여기서 하룻밤만 묵게 해주십시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도 이 성을 지키기는 하지만, 많은 나그네들이 이 성에서 잠을 자다가 저 개들이 얼마나 사나운지 개들에게 물려서 성한 사람이 없다오. 그래도 자고 갈 마음이 있으시오?”
젊은이는 괜찮다고 대답하고 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는데, 이상하게 개들이 조용했습니다. 알고보니 이 청년이 개들과 대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개소리를 배웠기 때문에 밤새 뭔가 그릉그릉대며 개들과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을 맞았습니다. 궁금한 주인이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어젯밤 개들과 무슨 대화를 했소?”
“네 당신은 여기 성을 지키는 주인이십니까?”
“아니오 난 이 성의 주인은 아니고 이 성을 지키는 지기이네”
“제가 놀랄만한 사실을 가르쳐 드릴께요. 저 개들은 지금 마법에 걸렸는데, 그 형벌이 이 성탑 밑에 깊이 묻어놓은 보물을 지켜야 하는데, 누군가에게 이 비밀을 알려주어야 자기들에게 걸린 마법이 풀린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 보물을 찾아달라고 그렇게 몸부림을 치며 짖었다고 합니다.”
“아니 자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나?”
“네 제가 개소리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 청년이 성탑 밑에 감추어진 보물을 파내서 잘 살았다고 합니다. 물론 개들은 마법에서 풀려났습니다.
2. 그 개소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인간 내면의 아픔과 분노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 절규와 분노와 상처를 파내면, 그 밑에는 보물이 있는데 그것을 알아달라는 비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절망과 분노와 아픈 상처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 것도 때로, 많은 경우, 이런 절규나 비명같은 아픔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리를 조금만 귀기울여 듣게 되면 그 속에서 보물과 같은 것을 건져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 개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합니다.
3. 오늘 우리가 걷는 시편 40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편 40:1)
지금 다윗은 자신이 무너져 온 그런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어떤 근본적인 목마름을 안고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4. 성경은 우리에게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들으신다’는 뜻의 시적인 표현입니다. 여기 다윗의 부르짖음은 모든 인간의 부르짖음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부르짖지만, 그 중에서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악에 관한 것입니다. 이 문제를 인간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영혼이 자기자신에 대하여 탄식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5.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편 40:2)
기가막힐 웅덩이는 자기에게 ‘답이 없을 때’를 말합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내 안에는 답이 없습니다. 또 기가막힐 웅덩이는 남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 분노할 수 없는 처지를 뜻합니다. 이것이 기가막힐 웅덩이입니다.
신앙 인격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으로(헤세드) 시선이 모아질 때, 비로소 바른 방향이 잡힌 것입니다.
6. 베드로가 젊은 시절에는 자기 의기와 울분을 토하는 신앙을 했습니다. 이런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삼 년을 따랐지만, 결국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는 자기의 진상을 대면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어도 과분한 기가막힐 웅덩이에 빠진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기가막힐 웅덩이에 던져진 자는 내 안에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반석위에 두셨다고 합니다. 이 반석은 성경에서 항상 하나님의 피난처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7.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편 40:3)
다윗은 음악가입니다. 그의 품에 하프가 들려지면 연주가였고, 그는 달빛과 별빛 아래서 악기를 타고 노래를 불렀던 사람입니다. 그는 수많은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새노래’라는 표현을 씁니다.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라는 시가 있습니다. 수 천년 뜨고 지는 달이지만 어느날 우리에게 그 달이 다르게 보이고, 그것이 그리움으로 나타나고, 새롭게 보이며 예전엔 미쳐 몰랐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건져진 사람이 맞이하는 새 날은 같은 모양이라도 새노래가 나오는 날이 됩니다.
8.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편 40:3)
다윗은 새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데 노래를 많은 사람이 ‘보고’라고 했습니다. 노래를 듣는 것인데 ‘보고’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입술에 새 노래를 올릴 때 많은 사람들이 그 노래를 ‘봅니다’. 그들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합니다. 찬송은 듣는 것만이 아니라 그 찬송을 부르는 자의 변화된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이 새노래가 ‘보여지기를’ 바랍니다.
9. 삼층의 지하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찬양을 불렀습니다. 간수와 지하에 갇힌 죄수들들은 그 소리를 듣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노래와 신앙의 노래가 다른 점입니다. 그들은 지독한 가난과 고통 속에서 감사와 찬양의 노래가 나올 때, 사람들은 듣는 찬송이 아닌, 찬송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찬양이 되어야 합니다. 찬양은 우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노래입니다. 그 노래를 사람들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는 찬양’입니다.
10. 이제 다윗이 더 깊은 이야기로 갑니다. 단순히 건짐을 받은 것만으로 노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에게는 그 노래의 실체가 있습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편 40:5)
11.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서 생각이 그렇게 많으신 것을 미쳐 몰랐다고 고백합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자기를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운명과 인생과 미래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십니다. 그것을 다윗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편 40:6-8)
12.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라는 말은 ‘자기가 누구의 이야기를 인용했다’는 뜻입니다. 자기 귀에 어떤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이제 자기의 귀에 들린 이야기를 다윗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귀에 들린 이야기가 무엇인가?
13.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까지가 다윗의 귀에 들린 이야기입니다.
여기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에서 두루마리 책은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메시아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오실 메시아가 하신 이야기입니다.
14. 다윗은 자기는 자기 속에 들끓는 죄의 문제로 몸부림 쳤습니다. 수많은 번제와 제물을 드려도 해결이 안되는데 어느날 깨달았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다윗아 그 수많은 제사와 제물로 네가 용서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으로는 안되느니라. 그런 율법적 노력과 종교적 열심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와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제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배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시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브리서 10:3-7)
15. 이 말씀은 이 땅에 오셔서 영원히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는 제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을 말씀합니다. 다윗의 새노래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에 기초한 ‘새노래’였던 것입니다.
다윗이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붕괴되는 자아 속에서 깊은 영혼의 밤 속에서 참된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새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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