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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미니스트리

예레미야 41-44장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예레미야 41-44장

1. 헨리 나우웬의 분별력이라는 책에는 ‘A Different Drummer(다른 드러머)’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이가 일행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다른 드러머(a different drummer)’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2. 우리도 우리의 생각과 삶의 자리에서, 박자를 놓칠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예레미야서에서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그들이 들어야 할 말씀의 결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계셨고, 계속 당신의 드럼소리를 들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자녀를 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3. 시대는 더욱 복잡해지고,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주시기를 빕니다”(골로새서 1:9-10)

바울이 말한 신령한 지혜, 총명은 우리가 정의하는 지혜, 총명에 대한 사전적 정의로 설명할 수 없는 ‘영적인 지식’입니다. 영적인 지식은 하나님의 드럼소리가 가까이서 비교적 선명하게 들릴 때만이 아니라 멀리서 희미하게 들릴 때에도 그것을 분별하는 지식으로 ‘신령한’, 곧 ‘영에 속한 것’입니다. 이렇게 영에 속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따르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4. 바벨론의 세력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위기의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선택한 지혜는 또 하나의 강대국인 애굽에 붙는 것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정치적으로 괜찮아보이는 선택이었지만, 하나님의 드럼은 다른 박자를 연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그들은 늘 하나님의 박자를 놓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 드럼소리를 듣고 놓치지 않고 있었던 선지자들을 오해하고, 박해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5. 예수님은 종종 ‘위로부터(from above)’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위로부터’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래로부터(from below)’ 보는 시각은 늘 우리가 붙잡아야 할 박자를 놓치게 합니다. 사람이 ‘거듭났다’는 말은 ‘Born again(다시 태어남)’을 말하지만, 곧 죄로 인해 죽은 ‘영’이, 다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방법은 ‘위로부터 태어남(Born from above)’입니다. 이렇게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드럼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린 것입니다.

6. 바벨론의 공격과 애굽으로 피신하는 이스라엘의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은 거기계시고, 예레미야를 통해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애굽의 올라옴에 잠시 물러났던 바벨론은 이제 애굽을 공격합니다. 하나님께서 벳세메스를 칠 것이라고 했는데(예레미야 43:13), ‘벳세메스’는 ‘태양의 집’이라는 뜻으로 카이로 북쪽 8Km 지점에 있는 성읍으로 우상들의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곳을 치겠다고 하셨습니다.

7.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애굽 땅에서도 변함없이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하게 했습니다. 큰 돌 여러 개를 가져다가 다바네스에 있는 바로의 궁전(지방 행정관청이나 바로가 순시 왔을 때 묵을 수 있는 별궁정도의 숙소)대문 축대 밑에 진흙으로 감추고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을 불러 이 돌 위에 왕좌를 놓고 큰 장막을 치고 애굽 땅을 정복할 것을 예언하게 했습니다. ‘큰 돌’은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정복했다는 증표로써 세우게 될, 그의 보좌의 주춧돌을 상징합니다.

8.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분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걷는 예레미야 45장에는 바룩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룩은 예레미야를 끝까지 믿고, 따른 제자요 친구였습니다. 그는 예레미야 대신 성전에서 예언의 말씀을 낭독했고(예레미야 36장), 여호야김이 예언의 말씀을 불태우자, 불사른 두루마리의 내용을 다시 썼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와 함께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은 ‘모두가’ 하나님의 박자를 놓쳤다고 말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9. 예레미야는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외로운 사역을 했습니다. 그때 바룩은 ‘한결같이’ 예레미야와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어려움 속에서 누군가가 함께해 주지 않음을 원망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누군가의 어려움이 한결같이 함께 해 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애통해 하지 않습니다.

10. 그러나 ‘눈을 뜨면’, ‘귀를 기울이면’ 항상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때로 그 손이 너무커서 그냥 벽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애굽을 치시는 바벨론에 대해서 하나님은 ‘내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속과 섭리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 무엇도, 그 어떤 것도 종으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어디에도 무엇에도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은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가 모든 피조물 속에 미쳐있음을 나타냅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편 1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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