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땅에서 이르기를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사라지리라 하는 너희의 이 속담이 어찌 됨이냐”(에스겔 12:21-22)
2.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를 향해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사라진다’는 말을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서 선지자의 예언과 묵시의 말씀이 그만큼 신빙성이 없고 시간이 흘러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비꼬아 표현한 말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는 당시 예언자의 말이 별로 효력이 없는 속담 정도의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3.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아니할지니 내가 한 말이 이루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에스겔 12:28)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방식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4. ‘내가 한 말이 이루어지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으로, 참된 예언의 성격을 말해줍니다. 곧 ‘성취’입니다. 참된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의 구분은 그 예언의 ‘성취’로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그 선지자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라면,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를 통해 반드시 언젠가는 그 말씀이 삶에서 구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쫓아가기만 한다면, 비록 시간은 걸리고 그 시간동안 많은 오해와 대적들의 감내할 만큼의 고통이 수반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5. 에스겔 12장이 참된 말씀을 전하던 선지자들을 향해 백성들이 공수표 같은 소리만 한다고 비아냥거리던 것과는 달리, 13장은 거짓 선지자들이 득세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강력한 경고성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부분입니다.
6.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들에게 경고하여 예언하되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이스라엘아 너의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으니라”(에스겔 13:2-4)
7. 그 누구도 자기를 가리켜 ‘거짓 선지자’라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처럼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말씀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익숙한 동물인 여우로 표현하였지만 성경에서는 ‘자칼’이 더 정확한 번역일 수 있는데, 바위 틈새에 숨어서 작은 동물 먹잇감을 찾거나, 썩은 고기라도 먹고자 늘 여념이 없는, 탐욕스런 짐승을 가리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서도 거짓 말씀을 진리처럼 포장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에스겔 13:19).
8. “너 인자야 너의 백성 중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여자들에게 경고하며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려고 손목마다 부적을 꿰어 매고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수건을 만드는 여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은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는 영혼을 살리려 하느냐.”(에스겔 13:17-18)
9. 당시의 여선지자들 중에는 부적이나 수건 같은 주술적인 방법으로 영적인 질서를 문란하게 만드는 거짓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리와 빵으로 복채를 받으면서 개인의 형통을 빌어준 것입니다. ‘예언’은 듣기에 좋은 말씀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며,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10. 몸이 아픈 사람은 건강하기를 원하고, 가난한 사람은 부하기를 원합니다. 이상한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병고침도 받아야 하고, 가난함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질병과 가난과 부조리함에 거하는 것은 죄의 결과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아프고, 가난하고, 억울한 것이 ‘나’에게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면 안됩니다. 이런 것들은 보편적인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결과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의 불행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내는 도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가난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풍부함이 자랑이 되거나 교만이 되지 말아야 하고, 가난이 비굴함이나 자기절망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11.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예나 지금이나 ‘번영신학’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12. 특별히 이 번영신학이 빈곤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팔리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면 당신의 소나 돼지가 죽지 않을 것이고, 등이 따뜻한 집을 갖게 되고, 손가락에 값비싼 반지를 끼게 될 것입니다!’라는 거짓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13. 무엇이 그리스도인을 아름답게 하는지!! 오랜 병상에서 몸도 마음도 지치고, 가족들도 마찬가지로 커다란 짐을 지고, 병세는 나아지지 않을 때, ‘나는 하나님 만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돌보시고, 이 고통을 통해서 나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라고 하나님의 역사와 주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복음이 되도록 용감해 지십시오.
14.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과 나의 작은 아이는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내 마음의 분깃이시라” (시편 73 :25-26)
15. 당시에 거짓선지자들의 모습과 매우 흡사한 ‘다른복음’ 중에 하나가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만연하고 있는 ‘번영신학(Prosperity Gospel)’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 번영신학에 빠진 목회자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잘못된 신념속으로 주님의 양떼들을 몰고 가고 있습니다.
16. 우리가 예배를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척하면서, 부와 편안(평안이 아님), 건강, 낙천적이고, 흥미를 끄는 재미있는 입담이나 농담으로 사람들을 이끈다면 그것은 유혹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예배 속에서 쾌활하고 승리한 듯이 느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영광속에서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을 것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이 십자가의 길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17.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고난과 슬픔 속에서 꺽이지 않는 평안과 기쁨의 확신이며, 이런 것은 만들어지고 조성된 생기가 아닌, 고난과 슬픔과 질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기쁨입니다.
18.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바로 ‘그 자리’에는 암으로 죽어가는 이들도 있고, 실패와 좌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심각한 우울증으로, 재정적인 압박 속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쾌활해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인지를 우리는 놓칠 때가 많습니다.
19.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항상 기뻐하십니까? 그렇지 못하지요. 그럴수도 없습니다. 이 ‘기뻐하라’는 명령어인데, 이 명령은 순종을 강요하는 명령어가 아닙니다.
20. 이 명령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기뻐하라’는 말씀을 다시 번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내가 너를 반드시 궁극적인 기쁨의 자리로 끌고 갈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21. ‘기뻐하라’는, 슬픈 일이 생기고,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도 웃어! 기뻐해! 이런 표현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어둠의 자리에서 불러내어 피로 값주고 산 이유는, 너를 이끌고 반드시 기쁨의 자리에 도달 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주도권이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과 성품의 가치’가 성경에서 항상 나타나는 우선적 가치입니다. 내가 너를 기쁨의 자리까지 이끌고 갈 것이고, 항상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22.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 세상에서의 부나 번영과 건강보다 더 낫다는 것을, 우리가 선택하는 ‘가치관’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스겔 17-18장 (0) | 2020.09.25 |
---|---|
에스겔 15-16장 (0) | 2020.09.25 |
에스겔 9-12장 (0) | 2020.09.25 |
에스겔 5-8장 (0) | 2020.09.25 |
에스겔 1-4장 (0) | 2020.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