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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걷다, 사사기 1-4장


1. 출애굽기 – 민수기 – 여호수아 – 사사기, 이렇게 이어집니다. 사백년 동안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꺼내십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 길을 걸어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의 적들을 쫓으시고 그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사기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마치 가나안을 목표로 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이제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왔지만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방의 적들을 일으키십니다.

2. 이러한 사사기의 자리에서 우리는 매우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애굽, 홍해, 광야, 요단강, 가나안에 이르기까지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선명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드러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패합니다. 열가지의 재앙을 보고,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신 사람들이 또 넘어집니다. 그들을 보면서 나를 보는 겁니다. 그리고 불안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 기적들을 경험한 사람들이 실패하는데 나는 어쩌란 말이냐? 사사기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성경은 너희의 허위를 벗겨내는 폭로자다!

3. 사사기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한 항복을 감상없이, 설명과 해설이 없이 써내려갑니다. 성경은 이쯤에서 타협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벗겨내시는 것을 넘어서서 인간의 본질을 해부하십니다. 하나님은 차선으로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푹 빠져 있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내용에 관한 문제이며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히 아는 자리까지 밀어붙이실 것입니다. 거기까지 가지 못하면 우리는 비난하는 자가 되고 자기를 기만하는 자로 머물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웁니다. 사사기 2장의 ‘보김’입니다. 보김은 ‘우는 자’라는 뜻입니다.

4. 사사기는 ‘하나님 앞에서 너의 인생을 살라!’ 고합니다. 그것을 ‘아름답다’고 합니다. 우리 옛말에 ‘아름’이라는 말은 ‘나’라는 뜻입니다. ‘답다’라는 말은 어른답다, 학생답다, 선생답다… 이렇게 쓰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답다는 말은 ‘나 답다’라는 뜻입니다. 가장 나 다운 삶, 자신의 가치를 그대로 품고 사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사사기는 회개하면 되는게 아니라 그걸 살아내라고 도전합니다.

5. 우리가 사사기를 걷다 보면 인간 됨의 한계, 비겁, 변덕, 배신, 음모, 더러움, 그리고 악의에 찬 역사적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나열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대강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남의 잘못을 비난하고 욕하면서 자기는 슬쩍 넘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시는데 자기 스스로 속는 겁니다. 하나님, 여기까지 가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는 겁니까? 하나님은 여기까지 내 몰아가십니다.

6. 그 과정, 그 모든 날들이 헛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기에 은혜를 담아 우리 스스로는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을 만드십니다. 사사시대의 내용들은 이스라엘의 흑역사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사사기 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아버지에게 이쁜 짓이 형들에게는 미운 짓이 되었습니다. 팔려간 애굽에서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자기가 한 일의 반대 결과를 당하는 겁니다. 감옥도 보통 감옥이 아니라 족쇄를 차고 있어야 하는 중죄수의 감옥에 들어갑니다. 거기에서 그의 넋이 빠져나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를 바로가 놓아줍니다. 그리고 총리로 앉힙니다. 누가 구원을 얻습니까? 모든 세상 백성이 구원을 얻습니다. 가뭄에 곡식을 비축했다가 다 살려냅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의 주관자가 되고 장로들을 교훈하는 자가 됩니다.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 깨닫습니다. 자기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는 것 을.

7. 이 요셉의 이야기를 대전제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전제를 놓치면 사사기를 걸으면서 사람들은 왜 이렇게 못났을까? 바보 같을까? 라는 정죄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잘잘못이 그들의 운명을 궁극적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붙드신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정하십니다. 저들에게 준 자유가 잘못 사용되었지만 그것으로 손해보지 않고, 순종한 자 못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 내십니다. 그러면 막살자!로 오해하면 바보입니다. 거기까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이 대신 할 수 없는 인생을 사는 긴장과 깨어 있음과 지혜와 기도의 ‘아름다움’으로 하루하루를 쌓아가야 합니다.

8. 우리가 어떤 처지와 수준에 있더라도 우리는 혼자인 적이 없습니다. 인생은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이 가지는 인생의 경이를 여러분의 인격과 현실 속에서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9. 버나드 쑈의 유명한 묘비명을 아시지요?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너 이렇게 어영부영 살더니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는 해석은 오역입니다. ‘오래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로 해석될 수 있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는 뜻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거죠.

10. 사사기를 보십시오. 이 책을 채운, 인간 됨의 한계, 비겁, 배신, 음모, 더러움, 그리고 악의에 찬 역사 속에서도 그들은 혼자인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잘했느니 못했느니를 따지며 판관(判官) 하지 말고, 세상에서 나의 마지막이 아름답도록 하나님과 함께 정당한 인생을 살아보자! 이렇게 가야하죠.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가 우리를 고발하는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