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걷다 Mosaic Ministry, 출애굽기 9-12장
1. 출애굽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 중에 하나가 열가지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열가지 재앙으로 결국 바로를 무릎 꿇리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십니다. 이 열가지의 재앙들을 보면 그 내용들이 초월적이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그런 능력의 하나님이라면 왜 구지 열 번까지 수고하셔야 하는가? 하나님은 단번에 애굽의 바로를 제압하실 수 있을텐데 왜 열 번인가? 이 재앙들을 보면 마치 바로와 밀고 당기기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밀고 당기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메세지’가 무엇인가? 우리는 다음의 요절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2. “그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출애굽기 8:22)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10가지 재앙 전체를 품고 있는 말씀입니다. 곧 열가지 재앙은 지금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기 위한 목표만으로 시행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온 세상으로 ‘알게하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이 재앙들이 반복되어 보이고, 하나님께서 쉬운 결과에 대해서 여러번 수고하신 것으로 보이지만, 이 모든 재앙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3. 이스라엘과 애굽은 똑같이 열가지 재앙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로와 애굽은 그것을 보고도 믿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믿었기 때문에 출애굽 한 것이 아닙니다. 똑같이 보고 나와서 애굽은 홍해에서 죽었고,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도무지 잘난게 없습니다. 로마서 9:14-18은 이 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라”(로마서 9:16)
4. 이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열가지 재앙의 싸움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며, 어떤 목적을 우리에게 가지고 계신지를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애굽과 바로로 상징하는 것은 인류가 처한 현실과 해결해야 하는 난제의 핵심을 밝히시는데 애굽을 사용하셨고, 이스라엘은 어떤 조건과 자격에 합격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목적하시고 복주시려는 모든 인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5. 우리는 신앙의 ‘이유’와 ‘조건’을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복을 받을 만한’ 이유를 가진 사람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축복의 조건을 ‘나에게서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가 받고 누리는 축복(이것이 무엇이 진짜 축복인가?에 대한 또 다른 깨달음이 필요하지만)은 그 조건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시고, 용서하시고, 아무런 조건이 없이 사랑하심에 근거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먼저 은혜를 입은 사람을 ‘자식’이라고 합니다.
이 자식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 자식의 ‘수준(class)’에 맞는 존재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어떤 법이나 규정에 맞추어 만들어지는 인생이 아니라, 사랑을 먼저 받은 자로서의 존귀함을 통해서 살아가는 것인데, 그것이 형통의 때에나, 혹은 고난의 때일지라도,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통치와 그분의 섭리와 그분의 경륜을 세상에 드러내는 존재로 살게 됩니다.
6. 한국교회는 한동안 기독교 역사상 가장 특별한 성장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성장한 것의 근거를 ‘우리 안에서 찾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제자훈련 때문에, 어떤 교회는 큐티 때문에, 어떤 교회는 탁월한 리더십 때문에, 어떤 교회는 새벽기도 때문에 성장했다고 합니다. 그것으로 모멘텀을 만들어 낼 수는 있어도 그것이 이유와 조건이 되어 부흥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답은 이유도 없고, 조건도 없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의 부족이, 인간에게서 그 이유와 근거를 찾으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엘리야 등등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의 이름들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그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태어나셔야할 조건들을 그들 ‘스스로 가지지 못했다’입니다. 사실 그 족보는 ‘죄인의 족보’가 훨씬 정확합니다. 그 죄인의 족보에서 예수님이 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역설입니다.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리더들은 무엇이 다르기에?’라고 질문하면서 하나님은 어떤 이유와 자격을 갖춘 자에게 상을 주신다고 하나님을 오해하기 시작했습니다.
7. 그렇게 성경을 보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엘리야 등등, 그 사람들 안에서 어떤 ‘이유’와 ‘조건’을 찾아냅니다. 베스트셀러가 된 수많은 서적들 안에는 하나님께 축복받는 10가지 원리, 시편 31편으로 사업을 했더니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다! 쳐다보는 법칙 등등의 ‘인과율’에 근거한, 곧 축복받을 만한 조건과 이유가 인간에게 있다는 생각들이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에 순종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유과 조건이 아니라 신자된 자의 당연한 책임이요,결과입니다.
8. 어떤 조건의 결과로 이루어진 사랑은 조건이 깨지면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완전한 조건에 부합되지 않음, 다시말하면 ‘근거’가 우리에게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조건없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조건없음’의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서 큰 ‘희생’, 곧 십자가에서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신앙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가 하나님 사랑에서 나온 ‘언약’인데, 그러면 잘 생각해보십시오. 약속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성취가 먼저입니까? 약속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예수님이 오실 것, 그리고 십자가의 사건이 약속으로 나타나있을까요? 예! 당연히 나타나있지요. 바로 그것이 구약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구‘약’이지요.
9. 언제부터인가 신학대학교가 종합대학교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국가와 사회적 흐름이었고, 이러한 교육부의 정책에서 신학교육도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거기서 살아남아야 했던 것이 아니라, 거기서 ‘죽어야’ 했습니다. 죽어야 사는데, 겨우겨우 살아남아 있지만 섞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죽은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언제부터 잘나졌습니까? 양들을 사랑하고, 더욱더 사랑하기 위해서 목회자가 학위를 따야 한다면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지만, 시장터에서, 병상에서 신음하는 양들을 섬기기 위해서 생명을 거는 목자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언젠가 말씀드렸지요. 사도바울이 한국교회 목회자라면 쫒겨났을 겁니다. 살인자 아닙니까? 베드로도 마찬가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사람 아닙니까?
기독교 신앙은 내 자신이 가진것과 이룬것으로 ‘조건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모세’만해도, 하나님이 그를 물에서 건져주시고, 그 자신에게 근거 없음의 과정을 지나게 하셔서, 사용하셨습니다.
10. 열가지의 재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통한 통치를 드러내어 ‘세상 중의 여호와 되시는 하나님을 우리로 알게 하시려는’ 표적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6-8)
구원이 이루어진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기 전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회개하기 이전에, 우리가 잘못가고 있다고 반성하기 이전에, 우리의 죽게 된 것을 어떻게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가기 전에, 우리가 우리의 처지가 어떤 지를,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알기 이전에, 우리의 반응이나 조건이나 이유이전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유일한 이유와 원인이 되어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보내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바로에게 왜 열번이나 재앙을 주시는가? 자꾸 자기 안에서 조건과 근거를 찾으려는 한 사람의 마음을 항복시키는 일에 하나님은 평생동안 밀고 당기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시면’하고 수없이 반복하며 살고 있고, 하나님은 그때마다 당신의 주권과 성실하심을 보여주셨고, 이에 대해 우리는 계속 배반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우리가 ‘항복하는 자리’까지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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