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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목사 메세지

부활절 메세지

1. 첫째 날 베들레헴 – 부르심의 길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가 5:2)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첫 번째 자리는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할아버지 보아스가 룻을 만나 결혼한 곳이고, 소년 다윗이 하나님께 처음 부르심을 받은 자리이기도 하지만, 베들레헴은 언제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 왕의 고향에서 구속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도 누울 자리가 없어 동물들이 밤에 쉼을 얻는 외양간에서, 그것도 동물들의 먹이를 놓는 돌 구유에 놓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부유하고 화려한 삶을 살고, 누가 보아도 부러움을 사게 되는 자리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리에 섰을 때 세상이 주목하지 않고, 힘들고 어려운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의 자리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은 구원의 일을 완성해 가십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2. 둘째 날 애굽 – 광야의 길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태 2:14-15)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문을 들은 헤롯 왕은 예수님과 비슷한 날에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모두 없애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예수님의 부모는 남쪽 광야의 길을 지나 애굽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이 430년을 살면서 큰 민족을 이룬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삶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스러운 노예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애굽은 예수님에게 피난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애굽에서의 삶이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목숨을 노리던 헤롯 왕이 죽은 후, 애굽을 떠나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손에서 구원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 인류를 죄와 사망의 손에서 구원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어린 예수님이 애굽에서의 피난생활을 끝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자세하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광야의 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약속된 땅을 믿고 걸었던 길, 광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약속된 영원한 나라를 꿈꾸며 걷는 길, 광야. 광야와 같은 삶에 지치고 힘들 때 기억합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3. 셋째 날 나사렛 – 희망의 길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태 2:23)
애굽에서 나온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자라셨습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아주 작은 곳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나사렛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가 등장하지도 않고, 아마도 구약 당시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작고 보잘것 없는 마을에 메시아가 나올 거라는 예언이 한 구절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11:1).
가지라는 단어는 원어로 ‘네쩨르’인데, ‘나사렛’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병들고 죽어가는 줄 알았던 나무에 새 가지가 나오며 생명이 살아나듯이 사망의 저주를 깨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인이 된 예수님은 공생에 가운데 어느 날 고향 나사렛의 한 회당으로 가셨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이사야서를 읽으며 자신을 통해 그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화를 내고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자신을 해하려는 이들 사이로 걸어 나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죄와 사망의 길에 복음의 빛을 비추며 살아갈 때 세상은 우리를 거부하고 심지어 해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병들고 죽어가는 줄 알았던 나무에 새 생명이 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병들고 죽어가는 세상에 한 줄기 희망이 되는 연한 가지가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 길을 가셨습니다.


4. 넷째 날 요단강 – 생명의 길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마가 1:9-11)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단이라는 이름은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물’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요단강은 아브라함과 야곱이,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건넜던 강입니다. 아람의 나아만 장군도 이 곳에서 일곱 번 몸을 씻어 병이 나았습니다.


이 요단강은 하나님의 백성이 새 삶을 시작하는 곳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가는 영적 삶의 분기점입니다. 예수님은 이 요단강에 직접 오셔서 세례를 받으시며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생명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삶을 시작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새로운 삶의 시작점을 귀하게 여기고, 그 자리를 시작으로 신실하고 책임감 있게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생명수 되신 예수님을 통해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것 처럼 우리를 통해 다른 생명들의 구원의 길을 열어 가십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 길을 가셨습니다.
 


5. 다섯째 날 예루살렘 – 구원의 길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누가 23:21)
유월절이 다가오자 세계 각처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유월절은 ‘지나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선조들의 역사를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기를 꿈꾸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당시의 역사를 떠올리며 어서 자신들도 로마의 손에서 구원 받기를 간절하게 바라며 명절을 지켰습니다. 이 유월절에 예수님은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환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세상으로부터 배신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 방법은 세상이 기대하던 바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버림 받고 멸시를 받으시면서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환영 대신 멸시와 조롱을 받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는 멸시와 조롱을 넘어서 구원의 길을 이루어 가십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 길을 가셨습니다.




6. 고난주간 여섯째 날 갈릴리 – 사랑의 길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마태 28:6-7)

십자가에 처참하게 처형된 예수님의 시신은 돌무덤에 놓였습니다. 굳게 닫혀진 무덤 밖의 세상은 절망적이었고, 눈물과 두려움의 시간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덤 안의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의 길을 여는 희망의 시간을 보내고 계셨습니다. 안식 후 첫 날 새벽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천사들은 예수님이 이미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을 기다리고 계신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을 선택하고 부르셨던 곳입니다. 베드로는 이 갈릴리에서 물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을 만나 그물과 가족을 버려두고 따랐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두려움과 절망으로 갈릴리에 돌아와 다시 그물을 잡았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시 만나셨습니다. 그것도 몇 년 전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와 비슷한 상황으로 찾아오셔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바랐던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아라면 부활 후 십자가 처형을 주도한 위정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을 만나러 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 후 바로 제자들을 처음 부르셨던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사랑과 용서, 용납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죽음과 같이 고통스럽고 어두운 시간, 두려움과 절망으로 흐느끼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면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자리로 돌아갈 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처음 만난 곳, 주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곳, 예수님이 먼저 그 곳에 가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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