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제자들과 함께 강건너편으로 넘어가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그 귀신이 돼지에 들어간 사건에 대해서는 교회를 쫌(?) 다녀본 분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사건입니다.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막4:35)
그런데 그 동네가 어디인지는 잘모르시리라 생각됩니다. 강 건너편으로 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또 왜 이러시는거지 할만한 상황입니다.
저편으로 가자!
강 건너편 데가볼리는 이스라엘 땅이 아닙니다. 데가볼리는 요단강 동편에 흩어져 있는 10개의 로마도시 연합을 이야기합니다.
데가볼리는 BC331년 마게도냐의 알렉산더가 유대와 시리아를 점령하면서 세운 헬레니즘을 표방하는 도시들입니다. 데가볼리의 펠라와 디온은 알레산더의 고향 마게도냐의 도시들과 같은 이름으로 붙여졌습니다. BC64년 폼페이는 유대 동편산지의 시리아를 점령하면서 데가볼리 동맹하면서 팍스 로마의 전략적인 지역으로 발전시킵니다.

그 도시들은 이미 형성된 헬라문화를 바탕으로 로마의 법과 제도를 적용하여 실용적이면서 화려한 도시를 만들어가면서 한편으로는 독자적인 통치방식으로 이루어지던 독특한 곳입니다.
헬라문화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이 도시들 옆에 붙어있는 갈릴리 땅은 데가볼리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고 항상 불안한 경계 지역이기에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리는 동네였습니다.
하스몬 왕가 시절에 데가볼리는 이스라엘의 지배아래 있었던 지역이기에 그 시절부터 이주해서 살아가던 유대인들은 로마의 이질적인 문화종교의 동네에서 많은 제약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을 돌아다니며 사역했을 때 이방인의 도시들이 모여 있는 데가볼리 지방을 찾아가시고,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데가볼리 사역을 모두 보여줍니다(마 8:28; 막 5:1; 눅 8:26-27).
데가볼리 지방 가운데 거라사 혹은 가다라에서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며 그 귀신을 돼지 떼에 들어가게 했을 때 온 동네가 발칵 뒤집어지고, 돼지 떼와 귀신을 병행하여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데가볼리 기적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데가볼리 지방이었을까? 예수님의 어록에서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막 4:35)는 표현이 있습니다.
AD 1세기경 갈릴리 호수 주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저편(the other side)은 호수의 이방인의 쪽, 즉 데가볼리 지방을 주로 가리킵니다. 그러나 ‘저편' 즉 데가볼리 지방은 이교적이고, 우상을 숭배하는, 정결치 못한 이방인들로서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 반면에 ‘이편'은 유대적이고, 정결하고(kosher), 종교적으로 정당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예수님이 ‘저편'으로 건너가자는 제안은 예수님 자신과 유대인이었던 제자들에게 매우 생소한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땅은 로마제국이 그 땅의 주인행세를 했으며 헤롯 왕조를 내세워 식민정책을 펼쳤습니다. 헤롯 왕조에 의한 식민정책은 세 지역으로 분할되었고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갈릴리 지방은 헤롯 대왕의 아들이었던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방문하신 가이사랴 빌립보는 헤롯 안티파스가 아니라 그의 이복동생인 헤롯 빌립이 통치하는 도시였고 데가볼리는 시리아의 총독이 통치하는 지방이었기에 사실 예수님의 이방 도시 방문과 말씀 사역은 국경을 넘나드는 거침없는 행보의 모습이었습니다.
원래 이방인이라는 말은 민족이란 개념이었으나, 후대에 와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유대적 개념으로 변질된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같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율법을 모르는 자들이나 창녀, 세리, 탕자, 병든 자, 갈릴리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며 유대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그들이 스스로를 '의인'이라 칭하고 율법을 모르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죄인'으로 낙인찍어 유대 사회로부터 소외시키고 밀어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예수님은 세리에게, 창녀들에게, 병든자들에게, 먹고 살기 바빠 율법을 모르는 갈릴리 사람들에게, 혼혈민족이 되어 개만도 못하게 여기는 사마리아에게 먼저 찾아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것들을 넘어서 진짜 이방인들에게도 찾아가서 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의인되어 그들을 죄인이라고 낙인찍었으나, 예수님은 그러한 현실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는 곳에는 언제나 무리들, 소외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으로 치부되던 맹인, 나병환자, 못듣는자,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할 때에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말하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4-5)
그래서 전통적인 유대주의를 고집하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무리를 두려워했습니다. 유대교의 위계과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판단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길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길이라며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고, 메시아로 구원자로 이 땅에 온 예수님은 점점 십자가의 길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예수, 예수를 입에 달고 살면서 예수 천당을 외치며,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이라 지칭하면서 과연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지 되돌아봅니다. 스스로 의인되어 남들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나요?
우리들이 만들어낸 울타리 안에서 똘똘뭉쳐서 그 밖으로 나아가지 않고 선을 긋지는 않을까요? 혹시라도 세상에 가서 그 안에서 세상에 물들어 하나님을 잊을까봐 겁을 내고 있지는 않은가요? 비대면 예배를 드리면 내 믿음이 떨어질까 두려워하나요? 그렇다면 삶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예배자가 되지 못해 세상에 속한 자로 살아갔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갈릴리로 가자! 사마리아 마을로 가자! 요단 강 저편으로 가자! 하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 사는 우리는 이미 세상속에 빛을 내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교회를 욕하는 글들이 기사들이 방송이 나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저렇게 방송에서는 교회를 비방하는데, 내가 아는 기독교인은 그렇지 않더라!는 반응이 있길 바랍니다.
믿음을 지키기 힘든 상황, 유혹이 매일 같이 다가오는 상황에 있다면 데가볼리에 사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위해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강을 건너 넘어오시는 예수님처럼 우리 곁에 항상 계시는 성령님이 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성경 속에서만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함께 하는 하나님을 신뢰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