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다양한 감정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감정은 희, 노, 애, 락 입니다.
희 기쁘고,
노 화나고,
애 슬프고,
락 즐겁고,
이러한 감정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할 감정은 바로 노. 분노 입니다.
분노의 감정을 가지고 성공했다는 사람을 저는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실패하고 고난에 빠지는 것을 더 많이 듣고 경험합니다.
분노는 파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분노의 감정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으면 스스로를 상하게 하거나 남을 상하게 하는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 분노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까요?
오늘 함께 보는 말씀에 등장합니다.
잠언 19장
11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12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의 이슬 같으니라
13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14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15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16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 자기의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는 죽으리라
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18 네가 네 아들에게 희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
19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 네가 그를 건져 주면 다시 그런 일이 생기리라
20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이 말씀 뿐 아니라 많은 말씀에서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 분노를 다스리는 것이 지혜이며 슬기라고 말합니다.
신약 에베소서 4장 26절에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분을 품고 있는 것은 사단에게 틈을 내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노하지말라고 말하지 않고 '더디하라' '해가 지도록 품지 말아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화가 나는 상황임에도 성경에서 내지 말라 했으니 안내는 척 꾸미기 보다는 분노를 맹렬하게 내뿜는 것이 아니라 한번 멈추고 더디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 중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참을 인 자 세번이면, 살인도 면한다"
이처럼 분노, 화를 절제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훈련이 되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분노는 단순하게 마치 누군가가 새치기를 해서 혹은 나의 약점을 놀려서 화가나는 것만을 이야기할까?
분노, 작게는 남탓을 하는것, 크게는 혐오하는 것 입니다.
저는 인간 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이 이곳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하나님이 여자,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리고 왔을때에 아담은 "내 살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 즉, 나의 가장 소중한 존재이다 라고 고백했으나,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물어볼때에 "하나님이 보내주신 여자가 나를 꾀어 먹었습니다."라고 여자를 주신 하나님을 탓하고 여자를 탓합니다.
아담고 하와의 첫 아들인 가인은 자신이 잘못된 방법으로 제사를 드린 것은 생각치 않고 동생 아벨에게 화를 쏟아내어 들판에서 돌로 쳐서 죽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시작에서부터 분노는 같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의 결과입니다.
요즘 시대를 돌아볼까요?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라고 비난하고 싫어합니다. 단순히 다른 생각인데 그 사람 자체를 거부합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의 여러가지 생각과 행동마저 싫어하려고 노력합니다. 서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하기보다 싫어하기를 노력하는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TV뉴스나 인터넷 뉴스를 보지 않는 것이 마음이 평안할 떄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알기는 해야 하나, 그 속에 빠져들어서 같이 어울러질 필요는 없기에 잠시 소식을 접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럼 이 분노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분노와 반대되는 것은 긍휼입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고, 히브리어의 그 기원은 모태에서 비롯됩니다.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를 안타깝게 여겨 돌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그 마음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향한 마음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지 않던 사람들을 향해서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분노의 상황 속에서 무조건 참는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 속에서 나로 하여금 분노하게 하는 대상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를 분노케 하는 그 사람을 어떻게 하면 긍휼히 여길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것일까요?
마음에 화가 많다면, 성경 속에서 긍휼에 대한 말씀을 찾아보길 권합니다.
대표적인 말씀 중에서 몇가지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다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아시죠?
유대인들은 자기의 형제인 사마리아인들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이방인들보다 심지어 길바닥에 개 만큼도 여기지 않고 멀리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사마리아 동네를 지나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싫어하는 사마리아인이 같은 유대인들도 무시하고 지나간 강도만난 유대인을 돌보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선대하는 자, 우리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잘하는 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아니라고 배워갑니다.
이것은 비유였다면, 스데반의 순교상황을 한번 볼게요.
스데반은 자신을 모함하고 돌로쳐서 죽이려는 자들 앞에서도 그들을 향해 분노를 품지 않고 불쌍히 여기고, 오히려 용서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상황에서는 같이 돌을 집어들어 던져도 그 누구 비난할 수 없는데 그러합니다.
(여기서 혹시라도 이처럼 무조건 고난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분노의 대상을 향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이루는 것. 이렇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 안에는 긍휼이 있고 더 깊게는 사랑입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 물을 때에 우리는 하나로 대답합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누가 너의 이웃이냐?
"강도만난 유대인을 돌보아 준, 유대인이 개만도 못하게 여기는 저 사마리아인이 너의 이웃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지 못하고 돌을 던지는 저들이 불쌍한 너의 이웃이다."
긍휼, 쉽지 않은 이 말씀을 우리의 삶에 녹여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성경을 읽어보지도 못한 불쌍한 우리의 이웃들에게
삶으로 성경을 읽어주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