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이사야 1-4장
1. 이사야서를 걸을 때는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사역이 어떤 ‘역사적 현실’이라는 무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는 동안에 북왕조 이스라엘이 망하고 곧 남왕조도 망할 것입니다. 이사야 1-5장에서는 이에 대한 급박하고 구체적인 위기가 먼저 등장합니다.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탓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같이 황폐하였고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같이 참외밭의 원두막같이 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이사야 1:7-8)
아람과 에브라임의 동맹이 쳐들어와서 일어난 황폐, 앗수르의 공격으로 황폐된 예루살렘에 대한 경험이 1장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7장에 가서 아람과 에브라임의 동맹의 일이 구체적으로 다시 제시되고, 36장에 가면 앗수르 공격에 관한 구체적인 정황이 소개됩니다.
이사야 1장은 그 사건들을 이미 알고 있는 자의 관점에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 방법은 그 사건들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볼 것인가? 그 해결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라는 메세지를 담고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2.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서를 아람과 에브라임의 동맹군에 의해 당했던 위기와 해결, 극복, 그리고 앗수르의 공격의 위기와 어려움 극복이라는 문제해결의 방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이사야 1:2) 의 말씀과 같이 주인이 있고, 의지가 있고, 분노가 있고, 소원이 있는 주체가 ‘있다’는 사실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바라보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는 신약에 이르러 모든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역사적 유산이 됩니다. 그것은 지금도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위기, 하나님의 약속, 교훈, 하나님의 뜻, 우리의 선택이 모든 역사와 인생에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사야를 이런 큰 그림을 담아내어 걸으면 좋겠습니다.
3.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을 때에는 왕이 없어서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소견대로 행했다고 성경은 기록했습니다. 그러면 왕이 있으면 나아질까? 라는 의문을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왕정에 관하여 ‘열왕기’와 ‘역대기’에 기록됩니다. 이스라엘은 그 모든 것이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앗수르는 바벨론에게, 바벨론은 페르시아에게, 페르시아는 그리스에게, 그리스는 로마에 망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간 결과가 아니라,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담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를 조심스럽게 걸어야 합니다.
4. 이스라엘이 왕정으로 오면서 사사기의 말미에 나타났듯이, 왕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매개자’의 지위였습니다. 곧 왕은 권력의 지위가 아니라 ‘책임의 지위’였습니다. 왕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자로서 그 지위를 가지고 있어야 했지만 이스라엘의 왕들은 매번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이후에 나라는 둘로 나뉩니다. 솔로몬의 통치 기간 중에 세워진 성전건축으로 인해 백성들은 매우 고단해 합니다. 솔로몬이 죽고 그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 북왕국의 10지파가 나서서 왕의 정치를 국민에게 조금 더 편하게 해주십사고 부탁을 합니다. 르호보암이 거절을 하자 10지파, 정확히 열하고 반(1/2)지파가 반발하고 나가서 북왕조를 만듭니다. 그 반지파는 베냐민 지파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절반은 북으로 가고 절반은 남에 남습니다. 절대 다수인 10개 반 지파가 북으로 갔기에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북이 쓰고, 남은 유다만 남았기 때문에 ‘유다’라는 이름을 쓰게 됩니다.
5. 그런데 성경은 북왕조가 다윗 왕가로 부터 분리해 나간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여깁니다. 다윗왕가로부터 분리된 북왕조는 자기의 정체성을 신앙적인 것이 아닌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군사적인 것으로 유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상을 숭배합니다. 북왕조에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 왕이 없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왕위도 역모에 의해 바뀜으로 피의 역사를 써내려 갑니다.
6. 당시 중동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은 아람입니다. 이 아람과의 전쟁에 이스라엘은 고통을 당합니다. 당시에 선지자는 엘리사였습니다. 그런데 아람이 한참 왕성하던 말기에 앗수르가 일어나 그 위협아래 놓이게 되자 이스라엘은 적대국인 아람과 손을 잡습니다. 그리하여 앗수르에 대항하려고 동맹국들을 연합하는데 유다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왕을 폐하고 자기네와 뜻을 같이 하는 왕을 세워서 동맹군을 강화하려고 쳐들어 오는 것이 바로 아하스때입니다. 이것이 아람과 에브라임의 동맹입니다(이사야 7장). 그 소식을 듣고 아하스의 마음이 바람앞에 산림처럼 흔들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7. 반면에 유다는 다윗 왕조를 이었지만 모든 왕들이 신실하지 못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영향을 받아서 많은 왕들이 우상을 섬깁니다. 아하스는 특히 심해서 그 아들을 몰록에게 바치는 지경에 이릅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남유다 아하스의 치세때 북왕국이 멸망했습니다. 그에 대해 몹시 두려웠습니다. 힘에 대한 두려움은 힘을 추구하는 것으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힘을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가 힘을 가지고 일해야 할 일이 생기면 조심하고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자나깨나 힘 조심.
8. 이렇게 이스라엘이 실패를 반복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소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과 현실에 집착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은 더 원대하고 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인간의) 영광과 명예를 목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쉽게 가지기를 원하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 쉽게 목적하시지 않으십니다. 귀한 가치를 가진 존귀한 자로서의 격(class)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긴장이고 문제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성경이 주시는 메세지는 이런 현실들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보통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하나님께 순종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빨리 회개해라’는 그리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잘한 것이 없는 것이 사실이고, 이스라엘의 멸망이 그들의 선택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은 우리의 잘잘못보다 더 큰 그림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자꾸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9. 우리가 보통 잘하면 복 받고 잘못하면 벌받는 것이면 ‘과정’은 필요없습니다. 그냥 우리가 잘했을 때, 끝장내고 하나님이 천국으로 부르시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계속 어떤 과정중에 있습니다. 승리하고 끝나면 좋은데, 그 승리를 계속 놓아두면 그 승리를 계속 연장해서 끌고 가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실력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못난 짓을 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기회를 주시고 선택하게 하시고, 그 선택이 결과하는 것을 보게 하시고 겪게 하십니다. 왜 그러실까? 그것은 우리가 가진 선택과 자유가 무엇인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하나님을 외면할 자유까지 주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까지…하셔야 하는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성령님이 오셔서 생각할 필요없이 잘해주셔서 고난없게 해주십시오. 더 바라지도 않습니다.’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럴 수 없다’고 하십니다. 네가 선택해라. 네가 결정해라. 그리고 거기서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10. 우리에게 하나님은 고난을 주십니다. 잘나서 받는 고난이 있고, 못나서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고난에서 예외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거기서 ‘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고 책임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잘못한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찾아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셨네! 아멘! 끝!이 아니잖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있어 계속 무언가가 진행되는 중이잖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엇인가? 이것에 대한 신앙적인 대답이 주어지고, 그것을 통해서 살 때까지 하나님은 이 과정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사사기가 지나고, 왕들이 넘어지고, 망한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닮은 형상으로 만드실 때까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11. 이렇게 기독교의 세계관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운영’하시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생과 삶의 자리에 대한 우리의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내가 그것을 고치고, 나를 통해서 이루는 것에 가치를 두었다면, 이제는 내가 거기에 있고,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그 과정에서 존재하는 ‘참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이 보이지 않아도 그 삶의 자리를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역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결국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요엘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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