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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미니스트리

이사야 9-12장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이사야 9-12장

1. 이사야 9-12장은 ‘임마누엘’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걸 확인하면서 걸으시면 됩니다.

“땅을 굽어 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 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쫒겨 들어가리라”(이사야 8:22)

상기한 말씀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9장에 오면 돌연히 반전이 등장합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들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이사야 9:1-2) 이사야서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같이 병행해서 등장합니다.

2. ‘멸망’과 ‘구원’은 함께 하기에는 너무나 멉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에서는 이 둘을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를 먹고 걸을 때는 이 멸망과 구원의 연결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은 역설을 통한 복음의 본질입니다.

이 시대의 우리는 그것이 십자가이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압니다. 결과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지불하신 것에 대해서 간단히 생각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사영리, 구원의 다리 등등, 복음의 원리에 대한 너무나 정확하고 명확한 원리들을 너무나 ‘간단하고’, ‘쉽게’ 적용합니다. 그러면서 그 희생과 사랑의 가치가 가지는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영리의 원리가 틀린 것이 아니라, 그 무게를 느끼지 못함으로 ‘안타까운 원리’라는 것입니다. 사영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십니다.

3.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주체는 ‘여호와’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를 보면 여호와께서… 주께서… 그리하신다는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이 ‘여호와께서’ 그리하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매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이사야 9:6-7)

4.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는 완료형입니다. 이런 문법적 표현은 흔들릴 수 없는 명확한 사실에 대한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이 예언이 7장에서 아하스에게 주어졌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b) 그런데 7장에서는 ‘나을 아기’이고, 9장에서는 ‘나은 아기’입니다. 곧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를 그립니다. 이것을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리라’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간단하게 하나님의 성취로 묶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 역사의 무게와 시대적 깊이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열심을 담아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명예가 얼마나 귀하고, 비교할 수 없는 가치관으로 사는 삶인지를 너무나 가볍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약속 속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행하고 계신 것을 분명하고 쉬운 결론 때문에 그 과정의 깊이를 채워내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서도 그 과정의 의미를 살아내지 못하게 됩니다. 그 결과 교회는 율법적 지식과 법칙으로 정죄하고 판단하는데 능해졌습니다. 만만치 않은 무게의 인생을 살아가는 고단한 인생들에게 들어가지(참여하지) 못하고 구덩이 위쪽에서 ‘그냥 올라오면 됨’이라고 소리만 치고 있는 것입니다. 참여 없는 참견, 하나님은 이것을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이사야 1:13b)고 하십니다.

5. 우리는 임마누엘의 사건을 경험하여 알고 있지만, 이사야의 원독자들에게 아직 그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임마누엘의 사건을 ‘기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기간은 기다림입니다. 기간은 인내입니다. 기간은 무엇인가가 이루어지는 중입니다. 무엇이든지 숙성되려면 기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 기간을 아주 소중하게 사용하십니다. 아하스가 에브라함과 아람의 동맹군 앞에 국운이 걸린 위기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징조’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

6.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서 봉함하라.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이사야 8:16-17)

이사야는 예언에 대해서 봉함하라고 합니다. 봉함한다는 것은 타임캡슐입니다. 먼 훗날 이것을 열었을 때, 이 예언이 성취되었나 아닌가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무엇을 합니까? 기다리며 바라봅니다.

이 ‘기다림’과 ‘바라봄’이 가치있는 단어지만, 기다려 보셨습니까? 바라보셨습니까? 어떠셨습니까? 기다림과 바라봄의 무게가 결코 간단하거나 만만한것이 아닙니다.

7. 이제 다시 이사야가 부르심을 받은 장면으로 가보아야 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이사야 6:8)

내가 가겠다는 이사야를 허락하시면서 이제 그가 할 일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사야 6:10)

8.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십니다. 오히려 깨달을 까봐서 남은 가능성 마저도 막으라는 것입니다. 죽이시겠다는 겁니다. 멸망시키시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입니다. 이 모순과 역설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 아닙니까? 만날 수 없는 심판과 사랑이 한 자리에서 만난 것입니다.

9. 이제 이사야가 묻습니다. “주여 어느때 까지니이까?” 하나님의 답은 황폐할 대로 황폐할 때까지, 곧 이스라엘이 멸망하기까지입니다. 이것이 원독자에게는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는 사건, 곧 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이사야 6:11-13a)

“… 밤나무와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가 남아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이사야 6:13b)

하나님의 일하심은 다가올 심판이고,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심판과 그루터기 곧 거룩한 씨입니다. 심판과 예수 그리스도, 진노와 사랑이 같이 있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모든 교회가 십자가가 중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십자가를 생각하고 평생을 묵상해도 그 깊이를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도의 어디쯤에 와있을 것입니다.

10. 이사야의 첫째 아들은 ‘스알야숩’입니다. 그 뜻은 ‘남은자가 돌아오리라’입니다. 여기서 ‘남은자’는 이스라엘입니다. 곧 성도요 교회입니다. 아사야의 둘째 아들은 ‘마헬살랄하스바스’입니다. ‘노략이 속함’이라고 각주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뜻입니다.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질 것입니다. 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대적이 남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남습니다. 교회를 친 자들이 남는 것이 아니라 얻어맞은 교회가 남는 다는 뜻입니다.

이 이름이 태어나기도 전인 아기에게 주어집니다(이사야 8:1-3). ‘예수 그리스도’ 하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됩니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납니다. 이사야의 두 아들이 태어나고, 동정녀에게서 아기 예수님이 태어납니다.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의 의미가 약속과 구원과 구속의 내용을 품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미래가 주어진 것’을 상징합니다. 기독교의 출생은 끝장을 보려고(죽은 것으로 끝나려고)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미래의 시작입니다. 이 역사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가 갑자기 어른이 되지 못합니다. ‘과정’이 있는데, 하나님의 열심이 그 과정을 지나게하시고 이루십니다. 그 과정을 걷는 길이 평탄치 않습니다. 우리는 만가지 진상들 속에서 별일들 다 겪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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