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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미니스트리

시편 131-140편

2020년 6월 25일(목)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시편 131-140편

1. 시편 131편은 다윗의 인생관이 녹아져 있는 시입니다. <겸손의 시편>, <겸손한 인생의 노래>라고 불리워지는 시편 131편은 다윗의 가장 다윗다운 신앙고백입니다.

시편 131편은 3절로 된 아주 짧은 시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먹고 걸을 때 유념해야 할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ideal)’것을 찾으려고 하기 보다는 ‘이야기(story)’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 모습의 실재(actuality)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야기(love story)입니다. 이상적인 것을 아름답게 그리는 것보다 실존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한 인간이 갖는 경험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길이의 여러차원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2. 목회의 연륜이 더해갈 수록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story(이야기)’로 말씀의 깊은 곳에 깔려있었던 것들이 조금씩 떠오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한 것이 자랑이 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형통할 때나 곤고할 때나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의 방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그들의 삶의 자리를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윗을 보더라도 우리가 그의 위대하고 좋은 점의 ‘교훈’을 찾아내려고 보아서 그렇지, 그 이면을 보면 그는 불행한 아버지였고,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었으며, 철저히 냉정하게 본다면, 시적이고 음악적인 재능을 가진 별로 배우지 못한 사람 정도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다윗이 중요한가? 그의 도덕성이나 탁월한 전투능력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 그의 인생으로 써내려간 ‘이야기’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으로 시를 씁니다.

3. 다윗의 이야기에는 단 한번의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 대신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부에 계시며 그의 삶의 자리의 모든 세세한 사건 속에서 ‘관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복음서에 와서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대단히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다윗의 모습은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기(豫期)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야기, 곧 예수 그리스도를 그려내는 이야기 속에 일상적이거나 평범한 이야기를 우회하거나 지나치지 않습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우리의 인간됨의 현실 속에 뛰어듭니다.

4. 사람들은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능력에 열광합니다. 당연히 영적세계는 이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결코 인간됨의 도피처나 우회도로가 아니며, 길이 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목수로 일하실 때 구부러진 못을 펴는데 성령의 능력을 사용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힘든 군대생활을 했습니다. 많은 훈련이 있었고, 위험한 훈련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제일 힘들었던것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구보하는 것, 보초를 서는 것, 그리고 선임과 후임들과의 인간관계 등, 곧 군인으로서 살아내야 하는 ‘일상’이었습니다.

5. 성육신의 무시무시한 참된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가 속한 일상과 우리가 가진 인간의 조건 속으로 들어오시고, 그것을 받아들이시며,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함께’ 하신 것 입니다. 하나님의 인간되심, 그 인간의 일상에 뛰어 들어오셔서, 인간의 한계에 갇히신 예수님이 진짜 기적입니다.

6. 성경은 ‘삶의 자리를 사는 영성’(earthy spirituality)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빨래하며 기도하고, 교통체증 속에서, 과다한 업무와 해결되지 않은 채 노래하는 영성을 다윗의 ‘이야기’에서 만나게 됩니다. 시편 131편은 이러한 다윗의 인생관이 잘 녹아져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편 131:1) 라는 다윗의 노래는 그의 살아온 인생의 식(式)을 말하고 있습니다.

7. 다윗은 역사에 길이 남을 왕이 되겠다는 꿈을 꾸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인 사무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을 뿐 아니라,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블레셋을 대파한 주역이 다윗이었습니다. 그후 온 이스라엘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하며 칭송을 받은 그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받은 기름부으심을 근거로, 혹은 거인 골리앗을 죽이고 블레셋을 대파한 전공을 근거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자 발버둥 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을 사울보다 더 알아주는 대중의 인기를 통해서 왕이 되어야 겠다는 논리를 펴지도 않았습니다.

8. 그는 사울왕과 그의 신하들에게 쫒겨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그래서 정당방위나 대의명분이 얼마든지 성립될 수 있었던 기회조차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의 신하 아비새가 다윗의 손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사울을 제거하겠다고 했을 때에도 그러한 아비새의 충정을 만류했습니다. 다윗에게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백 명이나 되는 부하들과 그 가족들의 안전을 지켜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사울만 제거하면 쉽게 해결될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상황이 어떠하건 자신이 붙잡은 신앙원칙을 굳게 지켰습니다.

9. 사울의 갑옷을 입은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에게 자신의 갑옷을 입혀준 사울은 그것이 다윗을 돕는 최선이었습니다. 사울이 아는 최선의 방법은 중무장하고 성능이 입증된 무기를 들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골리앗과 마주섰던 엘라골짜기, 즉 어떤 촌뜨기가 전문가들이 주름잡는 영역에 들어가고자 할 때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촌뜨기에게 갑옷을 입히고, 쎄미나에 보내고, 충고를 하고, 지침을 줍니다. 그렇게 무장한 다윗은 이내 거추장스러운 갑옷의 무게에 눌려 둔하고 어색하게 뒤뚱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10. 다윗은 사울의 갑옷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시냇가에서 돌 다섯개를 골랐습니다(사무엘상 17:40). 그 돌 다섯개는 수많은 세월동안 흐르는 물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킨 매서운 돌이었으며 다윗에게 이미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돌을 고르기 위해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시냇가에 무릎을 꿇고 있는 다윗은, 그 전쟁터에서 건강한 영혼을 가진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삶의 식(式)을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편 131:1)

11. 그리고 다윗은 자신이 교만한 데 마음을 두거나 시선을 빼앗기지 않았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편 131:2)

우리는 아이를 볼때 둘로 봅니다. ‘갖난아이’와 ‘젖뗀아이’입니다. 본문에서 ‘젖’은 엄마의 모유를 가리키는 단어로, ‘엄마가 아이를 위해 공급해 주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갖난 아이는 엄마의 젖이 전부인 아이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젖 뗀 아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젖을 떼기 시작하는 시기부터 ‘분리에 대한 불안’을 일으킵니다. 이 시기에 아이는 엄마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엄마로부터 독립된 개체로 자랄 준비를 합니다.

12. 그런데 갖난 아이가 젖을 스스로 뗄 수 없습니다. 엄마가 강제로 떼게 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 때 아이들이 느끼는 심정은 어머니의 거부에 원망과 불안, 두려움을 동반한 성장의 아픔을 경험합니다. 이때부터 아이는 스스로 걷는 것을 연습하는데 자주 넘어지고 엎어집니다. 그래도 이제는 엄마 젖을 먹을 수 없습니다. 혼자 스스로 일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걸어야 합니다. 아이가 스스로 홀로설 수 있을 때까지 엄마는 아이를 훈련합니다. 아이가 힘들어 울음을 터트립니다. 그때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안아줍니다. 그때 아이가 느끼는 평안함… 이게 ‘젖뗀 아이’입니다.

13. 갖난 아이에게 엄마는 자신의 생존을 책임지는 공급자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유아기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의 요구를 채워주는 공급자로만 이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불안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않았는지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젖 뗀 아이’는 엄마를 공급자 이상의 의미로 인식합니다. 채워져야할 요구가 응답되지 않아도 ‘엄마’와의 관계가 공급자 이상의 관계로 진전합니다. 다윗이 신뢰했던 하나님은 다윗을 위해 무엇인가를 주시거나 성취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2절을 보시면,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젖을 떼지 않은 아이에게 엄마품은 자신의 요구와 욕구에 대해 떼를 부리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젖을 뗀 아이에게 엄마품은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한 자리입니다.

14. 이러한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젖을 뗀 아이의 자리는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편 131:1)라는 다윗이 선택한 삶의 식(式)의 결과입니다.

시편 120편부터 시작되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그들은 일년에 세번씩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가 걷고 있는 삶의 식(式)을 점검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삶을 점검한 기준은 늘 하나님이었습니다(신위).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15.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편 131:3) 우리의 ‘오늘’을 붙드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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