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이사야 34-37장
1.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니라” (이사야 36:1)
앗수르 왕 산헤립은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을 다 정복했고, 이제 예루살렘만 남았습니다. 산헤립은 랍사게를 보내서 예루살렘 성의 항복을 요구합니다. 앗수르가 항복을 요구하는 내용들이 이사야서의 ‘메세지’를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랍사게는 히스기야는 싸울 힘이 없다고 하며 히스기야와 유다백성을 두렵게 합니다. 이 랍사게의 선동이 이사야 36:13이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2. “이에 랍사게가 일어서서 유다방언으로 크게 외쳐 이르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왕의 말씀에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 그가 능히 너희를 건지지 못할 것이니라.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신뢰하게 하려는 것을 따르지 말라.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시리니 이 성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할지라도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이 떠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각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을 것이며 각각 자기의 우물을 마실 것이요 내가 와서 너희 본토와 같이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포도원이 있는 땅에 옮기기까지 하리라. 혹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할지라도 속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자기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이사야 36:13-18)
3.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을 지켜내지 못한다. 그의 말을 믿지 말라. 그러니 산헤립에게 항복해라’ 하고,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를 랍사게가 말하고 있습니다. 산헤립의 명을 받고 온 랍사게의 표현들은 내용과 방법에서 큰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지위에 대한 도전들입니다.
4. “혹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할지라도 속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자기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이사야 36:18)
이 표현은 열국의 신들도 산헤립에게 망했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앗수르의 왕 산헤립은 신들 위에 있는 신으로 대우가 됩니다. 이러한 랍사게의 위협이 더욱 밀접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다음 절에서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스발와임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이사야 36:19)라는 표현에서 실제로 유다의 주변국들 그리고 사마리아 곧 북이스라엘의 멸망, 곧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겁을 주는 도전이었습니다.
5. 우리에게도 ‘랍사게’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나의 믿음을 흔들고, 사건들을 통해서 용기를 꺽는 것들입니다. 종종 말씀드리듯이, 사실보다 해석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실을 가지고도 창조적인 해석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해석이 건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실과 사건으로 인생을 운영합니다. 랍사게의 도전은 유다의 주변국의 멸망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유다를 겁주어 용기를 잃게 하는 것이었고, 그의 왕인 산헤립을 신격화함으로 두려움을 더욱 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랍사게의 도발에 대해서 유다는 응답하지 않고 잠잠합니다. 그 이유는 히스기야가 그렇게 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령하되 대답을 하지 말라 하였음이었더라”(이사야 36:21)
6. 여기에 반짝이는 한 사람이 바로 ‘히스기야’입니다. 유다도 결국은 멸망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히스기야가 등장합니다. 이 히스기야는 어떤 사람인가? 지금까지 걸어온 이사야의 흐름속에서, 멸망과 구원의 역설의 메세지 속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히스기야는 이 문제를 들고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듣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이사야 37:1)
7.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으로 나갔습니다. 거기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이 주어집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사람을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네가 앗수르의 산헤립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 하시고”(이사야 37:21)
“산헤립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입니다. 히스기야는 먼저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이것이 신위(神爲)입니다. 그리고 랍사게 같은 직위는 언급되지 않고, 곧 바로 산헤립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이사야를 통해서 직접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가 보낸 사람을 통해서 말입니다.
8. 이사야 36장과 37장의 구조를 잘 보실 수 있으면, 배역의 관계에 긴장감이 있는 대단히 재미있는 사극이 됩니다. 산헤립은 랍사게를 보내서 유다를 비웃고, 이에 대해서 히스기야는 하나님께로 나가고, 하나님은 이사야도 아닌 이사야가 보낸 사람을 통해서 랍사게의 이름은 나오지도 않고, 앗수르의 산헤립을 처참하게 심판하십니다.
이 내용이 이사야 37:22-29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에서 ‘그’는 산헤립입니다. 이후에 나오는 심판의 내용들이 매우 역사적이고, 그 역사에 대한 깊은 해석이 담겨져 있습니다. 특히 앗수르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포함한 주변국가들에게 대한 침공에 대해서, 앗수르의 힘도 하나님의 허락아래 있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9. 세상의 힘을 들어 교회를 치시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앗수르는 그것이 하나님의 허락하심 아래서 일어나는 일을 모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분노의 막대기의 역할 인것을 모릅니다. 그저 ‘힘’,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잘난 자가 되고 승자가 됩니다.
그러나 이미 이런 사실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이사야 10:15) 여기 도끼, 톱, 막대기는 앗수르인데, 이게 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10. 그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의 진 중에서 18만 5천을 칩니다. 산헤립은 도주하여 니느웨에 머물다가 그의 아들에 의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합니다(이사야 37:36-38).
이 부분을 걸으면서 우리가 어려울 때 기도하는 것,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있음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 것,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충만한 것, 그리고 현실, 사건, 사실만 보지말고, 더 깊은 세계를 보고 해석해 낼 수 있는 것에 대한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멸망과 구원의 책입니다. 그 안에서 히스기야는 그 시대를 사는 믿음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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