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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미니스트리

이사야 46-49장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이사야 46-49장

1. 이사야 48장은 47장에 나오는 바벨론의 심판과 함께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준엄한 메세지입니다. 49장에서는 이스라엘의 구원만이 아니라 열방의 구원으로 확대됩니다. 이러한 일들을 하나님은 종을 세워서 선포케 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이사야에 반복되는 개념으로, 의의 종, 의의 왕, 하나님의 종으로 등장합니다. 당시대에는 히스기야, 이사야, 고레스이기도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종들이 이스라엘의 어려운 시기에도 일하고 있음을 말씀하여 목적 없어 보이는 역사의 헛된 시간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2. 바벨론에 이스라엘이 사로잡혀 간 것은 역사적 시각에서 보면 정치적 군사적 패배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해석은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민족이면서도 하나님을 배신하고 그들에게 요구되었던 신앙에 대해 불순종한 것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은 이스라엘을 없애는 것,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정결케 하기 위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3. 그런데 이스라엘이 회복이 되는 사건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물리적인(군사력) 힘을 주어 바벨론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제 3의 나라, 곧 페르시아의 고레스를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고레스의 정치에 의해 이스라엘이 풀려납니다. 이러한 것이 역사 속에서 원인과 결과의 함수관계가 아니라, 이 모든 재료들을 종합하여 이끄시는 하나님의 의지적 개입, 하나님의 지혜가 됩니다.

4. 이런 것을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합니다. 주권은 실력이 있을 때 행사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실력이 무엇입니까? 죄와 사망의 종 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 자녀 됨의 실력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5.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과 자신에게 일어났던 심판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바로 그러한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속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6.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러실 것이라면 처음부터 바벨론에 포로가 되게 할 이유가 뭔가?’ 해방을 주실 때도 이스라엘에게 힘을 주어 스스로 자유케 되지 않게 하시고 페르시아와 고레스를 사용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은 이 모든 일들이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 라고 대답합니다.

7. 바로 여기에 성경이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다시 회복되는 것 속에 하나님이 어떻게 거룩하신 분인가? 그리고 그의 사랑과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이중적 내용이 어떻게 담길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서 이스라엘의 포로됨과 귀환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인생이 기독교 신앙으로 이해되지 못합니다.

8. 우리의 현실 속에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충성을 약속했는데, 우리 앞에 형통한 길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환경이 변하지 않으면, 적어도 우리에게 벌어지는 고난에 찬 인생을 극복할 수 있는 신앙적 경지를 주셔야 하는데 그것도 안 주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곧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과 다르다는 어떤 관문을 넘어서야 함을 알게 됩니다.

9.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기대하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이고 정치적이고 물리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닌 것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로마서 9장, 출애굽기 33장)

이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금송아지 사건 이후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에 대한 답변으로 ‘내 마음이다’라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이 ‘내 마음이다’라고 하신 것을 우리는 오해하여 ‘하나님은 맘대로 하신다’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은 법(기준)보다 높다’는 뜻입니다.

10. 그러면 그 높은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입니다. 이 긍휼과 자비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항상 대립의 각을 세우십니다. 이스라엘과 바벨론, 이스라엘과 페르시아, 모세와 바로… 이렇게 말입니다. 역사는 이렇게 주인공이 둘 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를 죽이자가 아닙니다. 이 모든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드러냅니다.

11. 하나님의 일하심은 역사에 어떻게 사실이 되고, 거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우리의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서 누구를 죽이고 이겨서 답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전생애를 통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걸려 있는 어떤 상황이나 모든 문제들은, 소극적으로 누구 때문도, 어떤 일 때문도, 자신의 한계 때문도 아니라 우리를 가르치시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가? 우리에게 무엇을 담으시려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는 악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스스로 의가 되고,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불순종 만 하게 됩니다.

12. 사도행전의 사건을 예로 상고해보십시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해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모여 주와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리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 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사도행전 4:23-31)

그들은 성령충만하여 ‘빌라도와 헤롯을 죽여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헤롯과 빌라도를 죽이지 않고 그 악조건 속에서, 그들이 지고 있는 자리에서 담대할 것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헤롯 저새끼가 안죽는다’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을 잘못이해하는 것이 없습니다. 헤롯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우리의 자연적인 기대와 성경의 약속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차이일까요? “그들이 옳게여겨 사도들을 불러 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사도행전 5:40-42)

13. 여기 초대교회 사도들이 무엇에 기뻐했는지를 유심히 보십시오. 악을 악으로 대하는 것에, 힘을 힘으로 제압하는 것에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 대하여 채찍을 휘두른 사건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의 실력에 이른 것을 기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합니다. 왜?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대단원의 막을 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14. 이러한 삶은 힘들지만 위대합니다. 스티브 맥킨과 더스틴 호프만의 빠삐용을 보면 감옥의 독방에서 6개월을 지나는 씬이 있습니다. 스티브 맥킨은 이 장면을 찍기 위해서 실제로 6개월동안 해를 안봅니다. 그리고 분장없이 이 장면을 찍었습니다. 이것을 감독이 억지로 하라고 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스티브 맥킨이 ‘자발적’으로 한 것입니다. 왜?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인들은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그 주인공의 실력으로 살아낸 것입니다.

15.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내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나라이고, 백성입니다. 용서와 긍휼과 자비라는 가치를 삶의 자리에서 담아낼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지는 자리에서 담대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길의 끝에서 완전하신 하나님의 관용과 자비의 풍성함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정황 속에서 우리가 담아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그릇이 너무 귀해지면 내용물을 못담습니다. 고려청자를 보십시오. 고려청자에 무얼 담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냥 빈청자 감상합니다. 질그릇에 보배를 담는 겁니다. 나의 연약함에, 나의 실패에, 나의 핸디캡에 그리스도를 담아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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