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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미니스트리

이사야 50-54장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이사야 50-54장

1. 이사야의 후반부는 이사야가 환상중에 예언을 받아 기록한 것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구해내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반복적으로 기록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결국은 구원하실 이스라엘, 곧 70년만에 회복할 나라를 무엇 때문에 바벨론에 넘겨서 고생하게 하셨는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했는가? 하나님은 그 일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 해결하고 그 긴 역사의 과정 속에서 무엇을 만들어 내시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이사야서의 구성이며 메세지입니다.

2.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복받으려면 순종해야지’, ‘잘못했으니 심판을 받아야지’ 라는 인과율적 교훈을 나열하는 것이 이사야의 목적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대답을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질문 속에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왜 고달픈가? 열심히 진실하게 살아도 왜 고난이 오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아도 그러한 현실이 변하거나 해결되고 보상을 받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모여도 고달픈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는 자꾸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답을 찾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우리는 누구인가?’가 초점입니다. 인생을 답을 찾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과정이 있습니다.

3. 선민인 이스라엘의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왜 일어나야만 하는가? 우리의 인생은 왜 이리 대책이 없는가? 하나님이 결국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왜 현실은 고달픈가? 라는 질문 속에서 이사야 53장이 등장합니다.

고난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고난은 인생과 인류 역사의 삶의 자리에서 질문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인생을 왜 살아야 하는가? 왜 이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 고난의 보상은 무엇인가? 고난의 보상이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억울함을 넘어 설 수 있는 가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런 깊은 것들이 성경의 질문입니다. 이렇게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질문하게 합니다.

4. 고난을 극복할 가치가 없다면 살 이유가 없고 짧게 살 수록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정체성과 가치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시점에서 이사야 53장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메세지의 실체가 바로 ‘이런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질색 하는 모습, 우리의 현실로 온다는 것입니다. 위대하게 전능자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이 모습은 꼭 우리의 모습입니다. 다른 모습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멸시를 받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습니다. 간고를 겪고, 질고를 알고,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고 멸시를 당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의 구원을 이루시는 방법, 모양, 좋아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합니다.

이제 거울을 보십시오. 그 모습이 딱 메시아의 모습입니다. 거기서 더 잘나면 메시아가 ‘아님’입니다. 지금 당신 모습 그대로 오셨다니까요. 바로 ‘나와 같아지신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가 오신 모습입니다.

5. 고난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주어지기 전에 하나님은 나와 같아지심으로 나와 같은 고난에 ‘참여’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지나면서, 기가막힐 자리에 살면서, 그것을 겪고 지나면서, 우리에게 남는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답’이전에 누군가가 나와 동행해준 ‘과정’이 가장 소중하게 남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연약한 나를 짓밟고, 다시 일어서려면 다리 걸어 넘어지게 하고, 자기중심의 의를 가지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내가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 자리에 메시아가 오신 것입니다. 나와 같아지시고, 나와같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셔서 나와 동행하십니다.

6. 바로 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개입이 현실 속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아무것도 아닌 자로 사신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메시아의 오심은 우리와 같아지신 것으로 인간의 본질 가운데 오신 것이기 때문에 놀랍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의 처세는 판단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고, ‘함께하는 것’입니다.

7. 하나님께서 멸시를 받고 고난을 받는 종의 모습으로 현실에 담겨졌습니다. 손을 뻗어 닿을 수 없는 곳에 계시지 않고 거울속의 내모습 그대로 오셨습니다. 어떤 과정의 답을 얻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이 과정을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주님의 처세를 배우고 따라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이 세상에 어떤 ‘메세지’를 던진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꼴을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8. 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하나님 닮은 꼴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어떤 분 이실까요?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26-29)

답을 아는 것은 큰 책임을 가진 것입니다. 답을 알고 잘못 사용되면 인생에서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그 답을 가지고 판단하고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과정에서는 계속 질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며 나를 이끄시고, 지금 어디론가 인도하고 계시는데, 그것이 약속으로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인생의 여정에서 무엇이 소중할까요? 그 나그네 길을 함께 동행하는 자가 되십시오. 하나님이 나와 같은 모습으로 찾아오시고 동행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모습으로 서로 물어가면서 동행하는 것입니다.

9. 우리는 이사야 53장을 읽을 때마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오시고 어떤 고난을 받으셨는가를 봅니다. 그 고통과 수치를 어떻게 감내하셨는가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 고통과 수치와 멸시를 항상 가지고 지금 일하고 계심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메시아(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영웅이 아닌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우리와 ‘함께’, 같은 ‘처지에서’ 동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10. 고난의 끝은 구속의 완성입니다. 약속된 구원의 여정에서 우리는 나와 같은 꼴의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갑니다. 배워가며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의 수준으로 연단됩니다.

“기독교의 기적은 대부분 외부로 부터 우리 삶에 끼어드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두려움과 배신감과 환멸을 느끼는 상황, 불안과 실망스러운 상황안에 숨어 있다. 말구유를 보라. 십자가를 보라. 그렇게 사는 동안 그리스도를 닮은 아주 인간적인 삶의 형성된다.” – 유진 피터슨

우리가 살고 있는 원망스러운 삶의 현장, 고통의 자리, 아직 답이 나오지 않은 시간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가시는 삶의 현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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