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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미니스트리

이사야 55-58장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이사야 55-58장

1. 이사야 1-39장까지는 북이스라엘과 남왕조 유다가 멸망하는 배경을 가지고 있고 40장 부터 55장까지는 바벨론 포로를 배경으로 하고, 55장 부터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사는 것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 각각의 부분들에는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3가지의 세계관이 있습니다. 1)1-39장의 세계관은 원칙과 심판의 세계관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불성실함으로 받게 되는 심판입니다. 2)40-55장까지의 세계관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초래한 포로된 징벌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은혜로 구원해 내시는 제시되는 세계관입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행하실 구원이 약속되고 노래됩니다. 3)그 결과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이사야 56장은 그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때 나타나는 3번째 세계관은 1차 세계관의 소멸이 아니라, 2차 세계관, 곧 은혜를 받은 사람이 다시 1차 세계관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2. 이 순서는 1) 율법 —> 2) 은혜 —> 3) 율법의 완성이 됩니다. 1차 세계관이 제시한 원칙과 심판의 세계가 2차 세계관에서 은혜로 반전되고 승리케 하시는 나라로 약속되었고 실현되었음에도, 1차적 세계관의 원칙이 소멸되지 않고 계속 이스라엘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회복되었지만 그 현실은 은혜의 세계관이 약속한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기쁘고 평안하고 형통하지 않고, 불안과 의심과 체념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3. 56장을 시작하면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1차적 세계관이 요구하는 것이 아직도 강한 요구로 등장하는 것처럼, 58장에서는 ‘금식’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 구성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우리가 금식해도 왜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기도해도 왜 돌아보지 않으십니까?라고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질문을 꺼내서 이것은 내가 원하는 금식도, 기도도, 제사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4. 너희는 밥을 굶은 것을 금식이라고 하는데, 내가 원하는 금식은 관용과 용서와 회복과 헌신과 사랑이라고 맞받아 치십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율법의 세계관이 은혜로 극복되고, 그러면 처음의 율법이 소멸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 율법이 완성됩니다. 그러면서 1차 세계관이 어떤 본질이 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이 채워져야 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3차 세계관입니다. 복음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입니다.

5. 1차 세계관에서 율법을 지키하는 명령이 그릇이라면 2차 세계관에서는 허락된 은혜가 그 그릇에 담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릇을 만들고 내용을 담는 문제, 형식과 내용의 문제가 매우 만만치 않습니다. 이 만만치 않은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아래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14-24요약)

6. 율법의 요구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 우리가 걷는 이사야에 기록된 대로’ 우리가 금식했습니다. 우리가 헌금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았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 담겨야 한다고 하십니다. ‘용서, 회복, 긍휼, 자비, 사랑이 담겨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옳고 싶고, 정의를 구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용을 담아주시지 않는 한 우리가 구한 의는 폭력되어 버립니다. 인간은 옳음으로 사랑하지 않고, 옳으면 정죄하고, 자신의 옳음으로 타인을 판단합니다. 옳은 것으로 틀린 것을 들추어내지, 옳은 것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7장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금식을 했는데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경건을 들이밀어 기준이 되려 합니다. 기도를 하면서 자비로워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이 아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옥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받아도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7. 마태복음 22장에 가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선생님 율법 중에 어느 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 22:37-40) 이것을 요약하면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8. 제1세계관, 곧 율법을 제대로 지키면 그 내용에서 ‘사랑’이 나와야 합니다. 사랑이 나오지 못하면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닙니다. 사과라는 열매가 열리면 그건 사과나무입니다. 그런데 전봇대에 사과라고 명찰을 달고 있다고 전봇대가 사과나무인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예배당에 나오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구원을 받은, 새생명으로 태어난 증거나 열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컵에 물이 들어있습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물었을 때 그것은 ‘컵입니다.’ 라고 하면 1차세계관이고, ‘물입니다.’ 하면 2차세계관입니다. 그런데 물을 달라고 하면 컵에 담아주어야 합니다. 담는다는 것은 그 그릇에 무엇을 담아내는가로 그 내용이 실채화됩니다. 그릇이 자기그릇일 수도 있고, 쇠그릇일 수도 있지만 거기에 무엇을 담는가로 그 내용이 실채화됩니다. 그래서 물을 담으면 물그릇입니다. 밥을 담으면 밥그릇입니다. 이것이 1차세계가 2차세계와 합해지는 방법입니다.

9. 이것을 바울은 질그릇에 보배가 담겼다고 했습니다(고린도후서 4:7). 우리가 질그릇이라도 보배를 담으면 보배그릇이 된 것입니다. 법, 윤리, 도덕이라는 제 1세계관의 그릇에, 제 2세계관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담음으로, 그 담긴 것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 진다는 것입니다.

10. 1차세계의 요구가 확보되어야 은혜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1차세계의 요구가 채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1차세계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2차세계가 오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금식을 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이사야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왔습니다. 우리가 구하지도 않았고, 그것이 필요한 것인지 조차 모르고 있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세상에 빛이 비추었지만 사람들은 그 빛을 보지 못했고, 그가 자기가 지은 자기 땅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1차세계의 요구만 열심히 행했고, 안식을, 금식, 헌금, 절기를 지켰지만 정작 그 내용을 담아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미 우리에게 들어온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세상는 결국 죽기 위해서 죽음을 거부하고 우리는 영원히 살기 위해서 매일 죽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가장 좋은 그릇에 담긴 가장 좋은 것이 아니라 가장 아닌 것 같은 그릇에 담긴 가장 좋은 것이라는 역설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가진 가장 놀라운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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