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에 이어서 다말 또한 사실은 주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유대인이라는 말의 기원이 된 이 유다를 한번 알아봅시다.
1. 유다가 야곱의 장막을 떠나다.
아버지 야곱에게 피묻힌 요셉의 옷을 가져다주며 요셉이 들에서 죽었다 거짓을 고한 형제들 앞에서 야곱이 오열하는 모습을 보고 유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물론 다른 형제들도 죽이고자 하였으나 일을 주도하여 노예로 팔아버린 사람은 유다입니다. 은 이십냥에 팔아 평등하게 나누었다면 유다의 손에는 은 두냥이 있었겠지요.
야곱의 슬픔을 보면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던 유다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친하게 교류하던 친구 '히람'이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의 도시 '아둘람'으로 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둘람은 피난처라는 뜻을 가진 도시입니다.
사람이 영적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면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 앞에 피난처를 삼거나 하나님의 낯을 피해 사람들 속에 피난처를 마련하게 됩니다. 유다는 하나님과 아버지의 낯을 피해 다른 곳으로 도망합니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창38:1-2)
그리고 그 가나안땅에서 가나안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세명의 아들을 낳습니다. 그 땅에서 얻은 이방 여인 가나안 여인은 하나님과 아버지 낯을 피해 도망간 유다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알았으나 자신의 죄로 인해 그 앞에서 도망간 사람의 삶은 세상 사람과 다를 것 없습니다. 오히려 더 악해지기도 합니다.
2. 유다의 아들들이 악을 행하여 죽다.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가나안 땅에서 가나안 여인에게서 얻은 세 아들 중에서 첫째 아들을 잃게 된 유다는 당시 관습대로 첫째 며느리를 둘째 아들에게 주어 대를 잇도록 해야했습니다.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창38:8)
그러나 둘째 오난은 다말에게서 자식을 낳는다 한들 자신에게 재산도 장자의 명분도 돌아오지 않음을 알고 밖에 설정함으로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그도 죽입니다.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창38:9-10)
오난이 땅에 설정하는 것이 왜 악한 행동이었는가? 여기에서 오나니즘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설정하매'라고 번역한 동사 '샥하트 (shachath)‘는 ’멸망시키다,‘ ’파멸하다,‘ ’부패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난이 땅으로 '샥하트'하였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오난이 땅을 부패하게 하였다는 뜻이다. 그는 소돔 도성의 성민들처럼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씨를 주지 않았던 행위가 폭력이다. 오난이 이기심으로 악하게 행하여 그의 형을 위하여 씨를 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형수를 위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뜻하게 대하여 자식을 갖도록 배려하지 않고 상속받을 재산이 탐이 나서 씨를 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땅에 설정하다'라고 옮긴 것이다.
이 일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문화와 관습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당시에는 *형수취수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형사취수제는 남편이 자식이 없이 죽은 경우 과부는 가까운 친족과 결혼하여 죽은 남자의 가문을 이어가게 하는 경우에만 국한되었다. 이런 이유 외에도 약자인 여자를 보호하여야 한다는 점과 남편이 남긴 토지 등 재산을 가지고 다른 족속과 재혼하는 것으로 인하여 토지와 재산이 분산되는 것을 막아 공동체를 보호 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3. 유다가 며느리 다말을 탓하여 아들을 주지 않다.
하나님앞에 악함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셋째에게 대를 잇게 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되자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셋째 아들에게 보내기를 꺼려합니다. 다말 때문이 아닌 유다 자신의 아들들의 문제임에도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문제를 나보다 남에게 찾는...
가나안땅에서 가나안 어머니 아래서 자란 유다의 자식들은 가나안의 풍습대로 살아가고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던 자들로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창38:11)
유다는 자식들의 죽음 앞에서 분명히 자신이 속인 야곱의 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바라보지 못하고 두 아들의 죽음의 이유를 며느리 다말에게서 찾습니다. 그리고 다말을 친정집으로 보내고 찾지 않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다의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유다의 친한 지인 '히람'이 유다를 양털 깍는 축제에 초대하게 되고 그 소식을 며느리 다말이 알게 됩니다.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창38:12-13)
4. 다말이 유다의 아이들 임신하다.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창38:14-15)
유다의 소식을 듣게된 다말은 창녀들처럼 얼굴을 가리고 유다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와 관계를 가지게 되고 후에 그에게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는 도장과 지팡이를 건네줍니다.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창38:18)
그리고 나중에 사람을 보내 도장과 지팡이를 찾으러 하나 이미 다말은 그곳을 떠났고 그곳에는 창녀가 없다는 말만 듣게 됩니다.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창38:20-21)
그 일이 기억에서 잊혀질때쯔음에 아이를 임신하게 된 다말의 소식을 듣게 된 유다는 격분하여 며느리 다말을 간음한 여인이라 하며 죽이고자 합니다.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창38:24)
간음한 여인이라는 죄명으로 끌려온 다말은 자신이 유다와 관계 맺었음을 증명하는 물건들을 내어 놓습니다.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창38:25)
자신의 도장과 지팡이를 보고 누구보다 알아본 유다는 아마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 기분이었을 겁니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간음한 며느리를 죽이겠다는 그 앞에서 자신의 추악한 면이 드러난 것이니까요.
막장 드라마의 한장면 같습니다. 악한 사람이라면 그것을 가짜다!! 하면서 은폐하고 죽여 입막음을 시도하지는 않을까 싶습니다.
5. 유다가 다말을 인정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성경을 보다 보면 이런 일이 어떻게 떳떳히 기록되었을까 생각하여 '에이 더러워' 하면서 얼른 읽고 지나가게 됩니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창38:26)
조금만 역겨움을 찾고 성경을 다시 보면 유다의 말이 다시 보입니다. 유다는 다말의 말을 듣고 인정하는 모습을 봅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추악함을 인정하고 간음하였다 끌어내어 죽이려했던 다말이 "자신보다 더 옳다."라고 합니다.
유다의 이 말은 다말의 도덕성과 믿음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그 동안 모른척 해왔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다말은 간음한 여인이고 근친상간의 죄를 지은 죄인이고 부정한 여인이나, 좀 더 깊게 바라보면 다말이 옳습니다. 당시 관습을 따라 유다는 셋째 아들 세라에게 다말을 주어야 했으나 자신의 아들들의 죽음의 책임을 그들의 죄가 아니라 다말에게 전가하고 아들이 어리다는 핑계를 대고 다말을 멀리 친정으로 보내어 모른척했습니다.
그곳에서도 다말은 과부의 옷을 입고 수절하면서 시아버지 유다의 말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다말이 창녀처럼 분장하고 유다의 아이를 가지려 한 것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닌 유다의 가문을 이어가려한 의도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장막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섞여 들어간 유다는 가나안 땅의 관습과 문화에 물들어 가는 동안, 유다 집에 시집와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된 다말은 비록 죄로 인해 죽은 남편이지만 '엘'의 권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과 명예를 걸고 유다에게 나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말은 본래 가나안 사람이었으나 유다의 집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 자입니다. 그런 다말이 가나안화 되어가는 유다를 일깨워주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유다의 성장>
이 이야기는 유다가 동생 요셉을 팔아넘기고 이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리고 그 가나안 땅에서 유다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경험하며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고 며느리 다말을 통해 자신의 위선과 죄인됨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후에 유다는 기근때에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 달라진 모습으로 자신이 팔아넘긴 요셉앞에 다시 서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가나안의 문화에 물들어 살아가면서 자식을 잃는 슬픔도 겪고, 며느리가 자신의 아이를 가지는 일로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사건들 이후에 다시 아버지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 유다는 그제서야 제대로 된 리더의 모습으로 다시 섭니다.
때로는 교회안의 사람으로 인해 내가 깨닫고 변화되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을 깨달을 때도 많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기독교인들의 삶속에만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떠날때에 여러분을 깨우는 타인의 목소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에게 집중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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