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saic Ministry, 창세기 20-23장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창세기 17:4-5)
1.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시는 상황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다! 아멘! 이렇게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심각한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웃기면서 웃을 수 없는 아주 묘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꾸지람에서 시작되었습니다(어제 말씀을 상기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꾸지람 가운데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으로 축복하셨습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2. 이제부터 사람들은 ‘아브라함 아브라함’이라고 그를 부를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습니다. 못생긴 저를 보고 생겼다 생겼다 하면, 놀리는 것이고 가슴아픈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하나도 없는데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면서 어떤 생각이 들까요?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은 축복의 이름이 될 것이지만, 지금 이 이름이 주어질 때는 결코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하면 불순종했던 상처만 쑤실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에게 자식들이 주렁주렁 있으면 ‘아브라함’하면 축복의 이름인데, 지금 아브라함에게는 자식도 없고,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위로 살았던 자신의 모습만 있습니다.
3. 우리 인생에서 가장 많이 쓰임받는 것이 바로 이름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불리워야 하는것이 이름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은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이름인데, 아브라함은 그 이름이 불리울 때마다 엣상처가 쑤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무시무시 합니까? 축복으로 겸손케 하시는 하나님 아닙니까? 이건 아재 개그가 아닙니다. 웃기면서도 웃음이 나오지 않고, 무시무시하면서도 겁나지 않고… 지금 아브라함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4. 지금 아브라함은 이삭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브라함! 아브라함!하고 부릅니다. 아들 하나도 없는데 사람들이 ‘많은 아들을 가진 아버님, 많은 아들을 가진 아버님’하고 부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많은 아들들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평생토록 십자가처럼 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다가 100세에 결국 하나를 낳게 됩니다.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런데도 이름은 계속 아브라함 아브라함, ‘아들부자 아들부자’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아들이 하나 밖에 없는데, 이름은 ‘많은 아이들의 아버지’입니다.
5. 너는 교회다니면서 왜 이렇게 공부는 못하냐? 넌 천국 간다면서 왜 그 모냥이냐? 이게 아브라함입니다. 당신의 연약함을 대면할 때마다 당신이 ‘아브라함’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바울의 고백에 놀랍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이보다 더 정확하고, 더 이상 신비할 수 없는 표현이 바울의 입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린도후서 6:8-10)
6. 우리는 십자가 앞에 끌려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에 내가 달리지 않은 무시무시한 존재입니다. 이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대신 달리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신비, 믿음의 비밀은 내 죄로 인해서, 나의 연약함과 잘못으로 인해서 지적받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들도 없는데 사람들이 우리보고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부릅니다. 타인에게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 하나님께 잘못한 자리, 아버지 하나님을 뵐 면목이 없는 자리에서 그분의 책망이 축복이 된 것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라는 꾸짖음과 가장 상처 많은 자리에서 떨어진 이름이 아브라함이라는 축복의 이름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아들도 없는게 아브라함이래~ 메롱’
7. ‘믿음’이란 무엇인가?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이 믿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봉사를 잘하고’, ‘믿쑵니다’ 하는 것이 믿음인가? 믿음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원리인 4영리를 달달 외우고, 전도지를 들고 따라하세요. 해서 마지막에 아멘! 을 받아내는 그런 간단한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르게 표현할 수 없어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믿음은 엄청난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나타나셔서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게 하신 것, 하란까지 인도하시고 머뭇머뭇하는 우리를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 애굽으로 갔는데 세상의 통치자 바로를 벌벌 떨게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것, 그리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318명의 오합지졸을 데리고 10개국의 전쟁터로 들어가 조카 롯을 구출해 온 것, 그리고 나의 실수와 실패, 그 이스마엘을 대면하게 하시는 하나님! 이 모든 과정을 바로 ‘믿음’이라고 합니다.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이라는 말씀은 그가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인 것이 아니라, 그 아브라함이라는 존재, 그 존재 속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것을 ‘믿음으로 여기셨다’는 뜻입니다. 기도해서 암병이 낫고, 인간의 생각에 대박나는 것만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만이 아니라,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문제가 있고, 여전히 연약한데,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셔서 지금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대면하여 알고 그것을 인정하는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관계의 다이내믹스가 ‘믿음’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쉽게 받고, 손대서 안수했는데 병이 나은 사람만 능력이 아니라,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문제 속에 있어도 나와 함께 동행하고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아내는 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9. 오늘 우리가 먹고 걷는 창세기 23장에는 아브라함이 사라를 매장할 소유지로 막벨라 굴을 사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헷족속에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창세기 23:4)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헷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합니다.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창세기 23:6) 이렇게 헷 족속은 아무런 대가 없이 기꺼이 자신들의 소유지에 사라를 장사하도록 아브라함에게 허락했습니다.
10. 아브라함은 헷 족속 에브론의 소유지 중에서 막벨라 굴에 사라를 장사하고 싶다고 하니, 헷 족속 중에 앉아있던 에브론이 기꺼이 자신의 소유인 막벨라 굴을 아브라함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은 사백세겔을 막벨라 굴의 값으로 치루고 사라를 막벨라 굴에 장사합니다. 이렇게 죽은 자를 장사하고 값을 치루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이심으로 값을 치루시는 것을 품고 있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건이나 환경이나 인물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그림자’로 본 것입니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시고, 이제 신약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실체를 보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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