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에 교회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혹은 예배가 무너지고 있다하는 말을 많이 듣는 요즘입니다. 저도 한때는 너무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그 기간이 짧았다면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르겠지만, 비대면예배라는 생소한 용어자체가 일반화되고 익숙해질만큼 지속되자 생각이 확장되고 깊어져갑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고 예배를 준비하며 말씀을 보면서 삶에서 적용되는 것들이 변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교회에서 설교자는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이 말씀을 많이 읽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4:24]
오늘 함께 보는 말씀은 사마리아 마을밖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입니다. 작년 이맘때쯤 똑같은 본문을 나눌 때에 우리가 보았던 포커스는 예수님의 찾아오심이었습니다.
코로나시대에 도래하고나서 이말씀을 다시 보니 요한복음 4장 19절 그 이후의 말씀을 제 눈에 들어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 동네에 친구하나 없고 수군수군 거리고 손가락질 받는 그 여인의 모습에서 현재 한국 교회의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여러가지 힘든 상황 속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궁금증이 무엇인고 하니,
어디서 예배하는것이 진짜입니까?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사마리안인들은 그리심 산에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왔는데 유대인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 예루살렘에서 드려야한다! 라고 말하는데 무엇이 진짜일까요?
이 질문을 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이 현재 비대면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마음이지 않을까요?
한쪽에서는 비대면예배도 예배다, 다른 한쪽에서는 예수님이 모이라 했으니 모여서 같이 드려야 예배다 주장하는 가운데 초신자들이나 아직 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성도들의 마음이 이말도 맞는거 같고 저말도 맞는거 같아서 어찌할바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리고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동일한 대답을 해주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이 산도 저 산도 아니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가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들이다.
얼마전에 알뜰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나왔던 내용을 다시 보게 된 적이 있습니다. 내용인즉 피라미드를 세운 파라오와 만리장성을 지은 진시황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하는 엉뚱한 질문으로 시작된 통계였습니다.
https://youtu.be/4SvfxGqBWjM
(길지 않은 영상이니 한번 보시면 더 이해가 잘되길 겁니다.)
저는 이 영상을 보면서 바벨탑을 세운 노아의 후손들이 생각났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상징물이나 건물을 높게 세웠습니다.
니므롯의 바벨탑, 바벨론의 지구라트,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만리장성, 느부갓네살의 신상 등등 그리고 한가지를 더해보자면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솔로몬이 세운 이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였습니다. 그런데 점차 이것이 변질되어 성전 자체가 하나님인 것으로 착각하게 됨으로 성전신학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유대인에게 성전은 더이상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우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비슷한 일들은 반복되어 왔습니다. 출애굽하자마자 시내산 밑에서 황금 송아지를 만든 것이나, 블렛셋과의 전쟁때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면 이길줄로 생각하다가 처참하게 패하고 언약궤마저 빼앗겼던 것처럼 반복적으로 동일한 죄를 범했습니다.
성전이 멀쩡하게 있는한 우리는 괜찮다!라는 이스라엘은 성전이 무너지고 바벨로 끌려가 70년동안 포로생활을 경험합니다. 다시 돌아와 성전을 세우고 제대로 믿는 듯했지만 또 성전을 믿기 시작할때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돌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지고 2천년간 나라없이 떠도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지 못하고 절기만 되면 무슬림을 향해 돌을 던지고 폭력사태가 일어나는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저 이스라엘은 왜 아직도 예루살렘 성전만 다시 세우려고 하는걸까? 왜 저기에 집착하나 하지만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예배를 교회에 집착했던게 아닐까요?
사람들에게 잘보이도록 좋은 위치에 크고 높게 보기좋게 건축하는데 수많은 인력과 돈이 들어갑니다. 대형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새로운 교인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중소규모의 교회들의 성도들은 보기좋은 대형교회로 수평이동을 하게 됩니다.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오니 교회를 더 멋있게 더크게 지어오다보니 사람들도 그런 교회만 찾고 그런 교회들이 좋은 교회라 생각하게 되고, 내부적으로는 낮아지는 법을 잃어버렸습니다. 높아지는데에 혈안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말은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받고도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 조카는 과자 하나에 삼촌 사랑해요를 외치며 안겨오는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 만약에 이 아이가 자라 오만원권이 아니면 삼촌과 놀아주지 않는다면 속상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현시대에 특히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형교회가 많은 한국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아닐까요?
대부분의 대형 교회들은 교회를 짓는데 억소리나는 빚을 지고 있습니다. 어떻게하면 헌금을 더 내게 할까? 하는 고민을 교역자 회의에서 합니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헌금 바구니를 돌리는 것입니다. 헌금 바구니 돌려도 얼마 걸리지 않는 작은 교회는 헌금함을 따로 두는데, 헌금 바구니가 돌아가는데만 한참의 시간이 걸리고 수많은 봉사자가 필요한 대형교회는 고수합니다. 눈앞에 들이밀어진 바구니에 민망함에 억지로 지갑을 열게 하여 덩치를 유지하는 대형교회를 보면 괴물같습니다.
헌금 바구니를 돌리는게 헌금이 많이 들어오기 때문이라는 직접적인 내용을 들은 이후에 저는 오랫동안 교회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소개해줬던 중국인 친구에게 이러한 대답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성경을 알고 싶고 하나님이 궁금한데,
교회에서 찬양20분 설교20분 헌금20분인데
설교 20분 동안에도 전도하라는 말만 하더라,
열심히 전도해서 돈을 내라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나는 어떻게 성경을 배우냐? 했더니
궁금하면 따로 성경공부를 하자더라,
그런데 평일에 나는 일하느라 너무 바쁘고,
주일에 쉬는 걸 포기하고 갔는데 안 알려주더라
이게 진짜 교회가 맞아? 종교가 맞아?"
이 말에 큰 충격을 받고 취업이 거의 확실시 되었던 돈잘버는 회사를 포기하고 신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헌금에 구애받지 않고 모습이나 예배 형식에 구애받지 않지만 항상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이루어보고 싶다는 게
제가 개척한 이유입니다. 옷도 자유롭게 입고 머리도 기르고 예배방식이나 순서도 바꾸지만 설교만큼은 보수적(?)인 이유가 제 나름대로의 소신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라는 장소에만 계신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분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삶의 예배를 입술로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을 만난 것으로 여깁니다.
어릴적에 강단에 올라가면 혼나던 것이 생각납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에서 강단에는 아무나 못올라가는 현대판 지성소를 자의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순간에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지성소에서의 구분을 없애셨는데 우리는 다시 만들어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마가복음 15장 37-38절)
얼마전에는 제 유튜브 영상을 보고 교회에서 예배말고 지인들을 만나 교제한다고 사단적이고 마귀적이라고 비판하던 사람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젊은 사람입니다. 아 이것이 교회의 현주소구나! 이러니깐 코로나로 인해 교회가 탄압받는다고 하는 거구나 생각이 들고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예배가 활성화 되어가는 이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생각만 하고, 입으로만 말하던 것을 진정으로 실천할 기회가 반강제적으로 생긴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을 만난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 아니라 우상숭배가 넘치는 갈대아 우르, 우상을 만드는 아버지집에서 였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순간은 자신을 죽이려는 형을 피해 도망치던 광야에서 홀로 있을 때입니다.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한 것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입니다.
이스라엘이 헬라제국에게 지배당할때에 우리가 지금 보는 성경의 첫번역본인 70인역이 나왔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시절을 통해 회당에 모여 말씀을 나누는 모임이 생겨나게 되었고, 예수님 승천 이후 금방 다시 오실줄로 생각한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에만 모여 있을때 로마에 의한 멸망을 통해 전세계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 코로나시대에 우리는 새로운 길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세계역사는 Before Christ(B.C)와 After Donime (A.D)로 나뉘었는데 지금은 Before Corona와 After Covid Virus로 나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세상은 새로운 패더라임을 맞이해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저는 더이상 교회가 세상에 뒤처진, 고리따분하고 지루한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많이 배워야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것은 목사나 전도사나 교회관계자만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각처의 전문성을 가진 크리스천들과 함께 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예전으로 돌아가야지 회복해야지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저에게 조언을 해주었던 대학교 교수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교회가 작다고 사역의 크기까지 작지는 않다.
이곳은 그저 베이스캠프일뿐이니 밖으로 나가서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찾아보아라!"
그래서 시작했던 것이 티스토리이고 유튜브영상이었습니다.(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다양하기 시도중이지만 그동안 제 생각들이 많이 깊어지고 보는 눈이 넓어진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2021년 트렌드 키워드 중에 레이어드홈이라는 키워드가 있습니다.
레이어드 홈이 무슨 말이냐면,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되고 앞으로 예전과 같은 생활로 완벽하게 회복되기 어려운 시대속에서 집의 기능이 더이상 의식주 기본 기능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다층적인 공간으로 변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집이 곧 헬스장이고, 작업공간이고, 놀이터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한가지를 더 추가하면 됩니다. 집이 곧 예배의 장소다.
저는 앞으로 제가 어떤 일을 하게될지 참 기대가 됩니다. 처음 마음과는 다르게 개척을 하고 5년동안 이런저런 시도도 해보았고,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하고, 목사라는 직분이 이렇게만 해야될까 하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시대에 그 고민의 정점을 찍고 있습니다. 제가 세상으로 파고 들어서 세컨잡(Second Job)을 가지게 된다 하더라도 저는 그리스도인이고 티스토리에 설교문을 작성하여 공유하고 어떻게 하면 복음을 잘전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 고민은 목사인 저만 해야하는 고민이 아니라, 모든 크리스천이 해야하는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삶속에서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되길 바랍니다. 더 이상 교회에 와서 예배드릴때만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가 교회 밖에서는 세상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장소을 초월해서 어디서든 하나님의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교회라는 장소에 매였던 마음에서 엑소더스! 탈출,하길 바랍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이 다시 이집트오 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도 으닙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어디서나 영과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는 예배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물론 교회라는 장소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장소는 베이스캠프일뿐입니다. 우리 각자는 흩어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다시 일주일을 잘살아가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