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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목사 메세지

크리스마스 메세지


예수님이 12월 25일 날 태어나셨을까요?
12월 25일? 그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1. 크리스마스
Christmas는 Christ's Mass(Christes Masse, 그리스도 미사)가 합해진 말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로마는 12월 24일부터 다음해 1월 6일까지를 동지절 대축제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12월 25일은 Brumalia라하여, Bruma는 “가장 짧은 날”이라는 뜻으로 12월 25일을 말하며, 하루 해가 가장 짧은 날 태양이 탄생했다는 생각으로 태양의 축제일로 삼았습니다.

4세기에 로마의 감독 리베리우스는 12월 25일로 크리스마스를 지키도록 하였는데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태양의 탄생일과 일치시킴으로 기독교를 이교도들에게 의미 있게 전하려는 선교적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2. 동방박사에 대한 오해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정한 로마는 이어서 1월 6일을 동방 박사가 아기 예수를 방문한 현현일 (Epiphany)로 기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동방박사가 몇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동방박사는 세 사람 일까요?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은 “박사들”이라는 복수 표현을 썼을 뿐, 세 사람이라는 말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실제로 10여일 만에 아기예수를 찾아왔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2장 11절에 보면,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마구간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집에 들어갔습니다.

또 영어성경(KJV)에는 아기를 “baby”라고 하지 않고 “young chil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짐작컨대, 페르시아에서 출발한 동방박사들은 예루살렘에 오기까지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장 7절을 보면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16절을 보면 헤롯은 베들레헴과 그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들을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러한 정황을 보아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경배한 것은 예수님이 나신 날로부터 대략 2년 정도가 지난 다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초라한 전나무에 소박한 옷 입히기
각 나라의 크리스마스 풍습이 여러가지이듯, 크리스마스 트리에 얽힌 이야기도 많습니다. 그 중에 한 이야기를 소개하면,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 밤에 마틴 루터가 숲 속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전나무로 빼곡하여 어둡던 숲 속이 다른 때와는 달리 전등을 켜놓은 것처럼 빛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주위를 보니 온통 세상이 은빛이었습니다. 흠뻑 눈을 뒤집어쓰고 서 있는 전나무 가지들 사이로 달빛이 마냥 따사로웠습니다.

어둡던 숲은 영롱한 달빛을 받은 눈의 반짝임으로 인하여 별들이 나무에 걸려 있는 것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상록수의 끝이 뾰족하여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전나무지만 달빛을 받으니 너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루터는 전나무 하나를 집으로 가져다가 별과 촛불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했다고 합니다. 비싸고 화려한 나무를 치장하기보다는 초라한 나무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크리스마스의 트리를 장식하는 의미가 살아날 것입니다.


4. 천사들의 멜로디
캐롤은 본래 불란서 말 carole에서 온 말로 주로 중세 불란서에서 둥근 원을 만들어 춤을 추었던 원무를 일컫던 말이었습니다. 캐롤은 본래 교회의 절기 때 마다 부르는 모든 노래를 일컬었지만, 특별히 크리스마스 노래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캐롤 중에는 천사들의 노래가 많은 것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역사상의 첫캐롤을, 천사들이 불렀기 때문일 것입니다. 목자들이 들에서 양을 치는데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 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는 찬양을 목자들이 처음으로 들었으나 그 멜로디와 화음이 어떠했는지는 애석하게도 우리가 알 길이 없습니다.


5. 싼타클로스(St. Nicholas, 270-350)
성탄절이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름이 산타클로스입니다. 그는 서기 270년에 소아시아지방 리키아의 파타라에서 출생했고 후에 미라의 대 주교를 맡았던 니콜라스라는 사람입니다. 니콜라스는 해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가난한 집을 다니며 추위에 떨면서도 곱게 잠든 아이들의 머리맡에 ‘아기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쁜 선물을 놓고 가곤 했습니다.

뚱뚱하고 불록한 배를 가진 싼타클로스가 선물을 배달하면서 "호! 호! 호!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즐겁게 외치는 것은 미국작가 워싱톤 어빙(Washington Irving)이 싼타클로스를 항상 웃는 즐거운 인물로 묘사한 Visit from St. Nicholas를, 1822년 클레멘트 무어(Clement Moore)가 노래로 작곡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싼타클로스가 흰 털이 달린 빨간 옷과 검은 벨트를 두르고 긴 고깔모자를 쓴 모습은 미국 만화가 토마스 네스트(Thomas Nast)가 1863년에 그린 만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의 산타클로스는, 약한 자, 가난한 자, 어렵고 힘든 자에게 아기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잘 먹고 잘 입고 살찐 사람들의 욕심을 채워주는 배달꾼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드러난 산타클로스만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6. 원조(original) 크리스마스
처음 12월 25일이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탄생 년도나 날짜의 기록이 전혀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교회가 성경에도 없는 크리스마스를 지키느냐?”라고 말합니다.

12월 25일이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12월에 오셨다는 증거도 없고, 오히려 이 절기는 이방종교의 태양신을 섬기는 축제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면서, 진정한 빛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주님이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로 바꾸어 지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12월 25일을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성경적 초점은 성육신의 비밀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위대한 사건을 기념하고 감사하며, 마음속에 임마누엘의 주님을 영접하는 신앙고백으로 12월 25일을 정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손을 걸어 약속할 필요가 없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낮은 데로 임하셔서 짐승의 밥그릇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을 영으로 만나는 축복을 구하며,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어려운 사람을 돌아보아 주는 자리로 내려가면 되는 것입니다.

7. 크리스마스는 화해의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소망없는 세상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인간의 자리에까지 내려오신 날입니다. 세상은 또 그런 상태로 무감각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이름 없는 한 마을의 누추한 곳에서 인간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을 엄청난 화해의 사건이 시작된 날 입니다.

8. 크리스마스에는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낮아지셨고, 연약한 아기로 낮아지셨습니다. 그분은 초라한 짐승의 마구간으로 오셨고, 겸손히 구유에 누이심으로 가장 낮고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보상 없는 선물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겸손한 모습으로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으로 전하는 물질적 선물, 정신적 선물, 마음의 선물, 그리고 평강의 주와 함께 시작된 평화의 선물을 나누어야합니다.

9. “크리스마스에는 기적이 일어난다”
2차대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한 부인이 식료품 가게에 와서 성탄절 만찬에 아이들을 먹일 수 있을 만큼만 식료품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돈이 얼마나 있느냐고 주인이 물으니 “남편이 전쟁에 나가 죽어서 기도밖에는 정말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기가 막힌 표정으로 물끄러미 쳐다보던 주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당신의 기도를 종이에 써서 주시오. 그러면 그 무게만큼 식료품을 주겠소!” 그러자 놀랍게도 부인은 접혀진 메모를 주머니에서 꺼내더니 주인에게 건네주면서 “우리 애가 지난밤에 아팠는데 옆에서 병간호를 하며 기도를 적어 두었지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가게 주인은 읽어보지도 않은 채 구식 저울의 추를 놓은 곳에 기도가 적힌 종이를 놓았습니다. “자, 이 기도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한번 달아봅시다.” 그런데 놀랍게도 빵 한 덩어리를 놓았는데도 저울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식료품을 올려놓았는데도 저울의 눈금이 움직이지 않자 주인은 당황했습니다. 주인은 잠시 머뭇거리며 저울 가득히 올려진 식료품을 봉지 담아 여인에게 주었습니다.

그 부인은 눈물 흘리며 식료품을 들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부인이 돌아가고 나서 주인은 저울이 고장 난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 왜 그 부인이 미리 기도를 써 가지고 왔을까? 하필 그 부인은 저울이 고장났을 때 왔을까?”

그 부인이 적은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그 때 주인의 마음속에 속삭이는 조용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 부인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고, 하나님은 자기에게 식료품 전달을 지시하신 것”이라고...... 그 후 식료품 가게의 주인은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식료품을 상자에 가득 담아 동네에서 어려운 가정 현관 문 앞에 조용히 갖다 놓았다고 합니다.

10. 제주한교회 여러분, 크리스마스에는 아름다운 일이 일어납니다. 아니 아름다운 일, 가치있는 일이 일어나게 하길 바랍니다.

11. 우리 모두에게는 크리스마스의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날 밤, 하나님의 러브 스토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가득했고, 예배당 뜰 가득히 무릎 위까지 차오르는 하얀 눈이 내렸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기쁨과, 사랑과, 관대함이 쌓인 눈만큼이나 풍요로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구간에 나시고, 그분의 무한하심과 전능하심이 죄로 얼룩진 인간의 역사 속에 어린 아기의 울음으로 오신 것을 묵상하는 것은 기가 막힌 일입니다. 성 육신은 우주의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말 구유에 나시던 날, 하늘은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천사들은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고, 하늘의 별들이 심상치 않게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오직 사람들만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12. 크리스마스는 ‘기다림’의 소망과 믿음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의 긴 기다림이 결실한 날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것은 기다림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생명도 기다림으로 탄생합니다. 알에서 병아리를 꺼내려면 기다려야 합니다.

13. 여러분이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정말 어렵고 힘든 환경이지만, 때로는 미움을 당하고,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아름답고 영롱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내 인생에 맡기신 위대하고 가치있는 일을 위해 수고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다리는 자는 축복을 받습니다. 기다림이 가치있는 것을 만들어 냅니다. 끝까지 기대하고 기다림으로 복된 인생을 허락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4. 크리스마스는 ‘영접하는 날’입니다. 오래전에 영국의 런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런던 교외의 한 농가를 지나던 일단의 무리들이 한 농가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집의 주인에게 우산을 하나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별 생각이 없이 자신이 쓰던 우산중에 제일 낡은 것을 하나 주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주인인듯한 한 여인에게 그 우산을 씌워주고 그 집을 떠났습니다.

15. 다음날 어떤 사람이 아주 예쁘게 포장된 편지와 함께 그 우산을 다시 가져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감사합니다.”라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어제 우산을 빌렸던 여인의 싸인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싸인은 “엘리자베스 여왕”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농부가 얼마나 후회를 했겠습니까? “그분이 여왕인줄 알았었더라면 네가 정성을 다해서 그분을 영접했을 텐데… 그분에게 내가 가진 최고의 우산을 드렸을 텐데…”

16. 런던 교외의 허름한 농가에서 일어난 사건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던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지만, 이 사건의 엄청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분을 만날 수 있는 특권을 상실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7. 헤롯왕은 당시 유대를 통치하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태어나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 아기를 경배하기 보다는 자신의 왕권에 대한 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는 왕의 태어나심에 대해 불안했고,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헤롯이 어떤일을 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당시 베들레헴과 그 지경에 있는 2살이하의 어린이들을 다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살육의 칼을 가지고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헤롯은 왕을 영접하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왜? 예수님 때문에 자신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8. 오늘도 수많은 헤롯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나가는 것이 시간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자신이 누리고 있는 무엇을 빼앗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인이, 친구가 교회에 나가면 빼앗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요, 더욱 더 풍성히 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19.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때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헤롯은 동방박사의 방문을 받고, 서기관들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놀랍게도 서기관들은 구약성경의 미가서를 인용해서 예수님의 탄생이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알았고, 정확하게 예수님의 탄생 장소를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날, 베들레헴의 마구간에는 서기관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습니다.

20. 교회에 오래 다니고, 모태신앙이고, 직분을 받다 보면 소위 종교적인 지식은 저절로 늘어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라는 것과,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이 그들의 고백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베들레헴으로 찾아갈 발이 없었습니다.

21.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아기예수께서 말구유 위에 누이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말구유에 누우신 이유를 ‘사관에 있을 곳에 없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사관’은 여관을 말합니다. 그 당시 베들레헴에는 호적을 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다른 많은 손님들을 맞이하던 여관주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22.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역사는 BC와 AD로 나누어 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거듭난 삶을 증언합니다. 우리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으신 그분, 기묘자요, 모사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전능하신 분이시요, 세상의 빛이시요, 영존하시는 예수님, 바로 그분이 지금 문밖에 서있습니다.

그런데 여관주인은 그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합니다. 왜? 먹고 사는데 바빠서 입니다. 손님들이 밀어닥치고 두둑한 팁을 받고, 금새 부자가 될 것 같은 환상 속에서 참된 복의 근원이신,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것입니다.

23. 땀흘려 일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이 크리스마스의 계절에 이제 새해를 앞둔 이 귀한 시간을 지나면서 여러분의 우선순위에 대한 확실한 고백을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24. 성경에서 가장 슬픈 구절은 요한복음 1:11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모두가 아기예수님을 영접하는 축복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25.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라고 말씀합니다.

26.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보았다>는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의 눈으로 무엇을 보게 되는 것을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본다>는 말을 이와 같이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 이해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 모르는 데서 오는 오해입니다. 우리의 눈은 육신 뒤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데 아무 도움이 안될 뿐 만이 아니라 때로는 치명적인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눈에 보이면 금방 믿고 무릎을 꿇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3년 동안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27.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에 많은 것들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보이고 내 환경과 사건을 통해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C.S. 루이스는 “고난은 하나님의 메가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메가폰으로 소리를 쳐도 못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지 못합니다. 육신의 눈은 멀쩡하게 떠있는데 영혼의 눈은 봉사입니다. 임박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합니다. 다른 소리는 잘 듣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귀가 먼 것입니다.

28. 어느 생물학자가 혼잡한 런던의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화원 앞을 지나다가 귀뚜라미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그런데 길을 걷다가 동전을 떨어뜨리면 사람들은 금방 고개를 돌려 바라봅니다. 돈 소리를 듣는 귀는 개발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없는 것입니다.

29. 크리스마스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

30. 히브리서 11:1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합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고 대답하십니다. 보여달라는 사람에게 믿으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31.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반응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바른 태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합니까? 믿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머리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대하는 것, 곧 인격적인 반응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할 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문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이 문이 열리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으면 보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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