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40장 1-8절
광야, 한적한 곳, 빈들
제가 예전에 이해하던 광야는 내 주변에 잡다하고 번잡한 소리들이 없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는 곳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조용한 곳에 가서 조용한 시간인 새벽에 기도해야만 하나님의 응답이 잘오는 줄만 알았는데 그것만은 아닌가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두려움의 장소입니다.
자신들이 평생 살아온 환경과는 생소한, 모든 것이 새롭고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살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하는 곳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안에 떨면서도 다른데는 의지할데 없어 다시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구름기둥 불기둥을 졸졸 쫓아가고, 매일 새벽에 내리는 만나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는 장소입니다.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신8:4]
그런데 그 불안한 장소인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40년을 다니면서 굶어죽지도 않았고, 목말라 죽지도 않았고, 그들의 옷마져 헤지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성경 속에서 이것보다 더한 하나님의 동행과 사랑의 시간이 있을까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보다 이삭보다 야곱보다 더한 사랑의 시간을 보낸 민족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들릴때까지 이리저리 흔들렸는데 이스라엘의 앞에는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40년을 하나님이 함께 함을 경험했던 시간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하나님을 광야의 신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의 우상을 따라섬길 때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광야는 할 수 있는게 없는 곳이나, 하나님에게 광야는 실력발휘를 할 수 있는 땅입니다.
메마르고 거친 그땅이 하나님의 나와바리입니다. 메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살아나 군대가 되는 것처럼 가망없이 망가져버린 우리의 삶이, 우리의 마음이 변하게 만들 유일한 존재는 하나님뿐입니다.
[사40:6-8]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사람은 풀과 꽃처럼 마르고 시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그것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기억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기독교의 회심은 사랑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해 새로운 개념이나 가치를 개발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받는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여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와 사랑에는 죽음이 뒤따릅니다.
기독교의 신앙에서 이 죽음의 십자가가 사랑의 중심이 됨에도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죽음을, 그 리스크를 최소한으로 하면서 가장 많은것들 받아가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효율을 따지면서 그것을 위해서 헌금하고 예배하고 봉사합니다.
그런데 광야는 효율을 따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장소입니다. 나의 생각과 나의 노력은 통하지 않는 그 곳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갈때에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하루 하루 살아갑니다. 믿음이라면서 그 자리에 멈추고 회사를 그만 둘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믿음이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조상들을 따라하는 것입니다. 광야에 서서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 모르면서 하나님의 인도함을 쫓아간 아브라함처럼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창12:7-8]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하나님을 만난 그 곳에서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그 모습을 닮아가길 원합니다. 이런 방법 저런 방법보다 우선 된 것을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세와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만난 곳에서, 도착한 그 곳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생활화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처럼 예배를 쌓아가길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광야같은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예배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무목사 메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