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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목사 메세지/성경 속 주연들

[성경 속 주연]#8-3 애굽의 노예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으로 노예로 끌려가는 길은
마치 죽음의 길 같습니다.

부자집에서 가장 사랑받고 존귀한 대접을 받던 17세 소년 요셉에게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집니다.

요셉을 사간 이스마엘 장사꾼들은 가나안의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가져다가 애굽의 여인들에게 팔던 자들입니다.


요셉은 애굽말을 할 줄도 모르고 그들의 손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바로(파라오)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에게 팔립니다.(창39:1)

그 나라 말도 모르는 요셉은 처음에는 허드렛일부터 시작했을 것입니다. 저 같으면 죽더라도 도망칠 생각만 했을 것 같은데 요셉은 그 안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애굽말도 빠르게 익히면서 보디발의 집에서 잘 적응해 나갑니다.

친위대장의 집에 오는 사람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애굽에서 지체 높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애굽의 정책과 살림을 나누고 정치, 경제, 군사적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의 시중을 들면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애굽을 배워나갑니다.

나중에 요셉이 총리가 되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라고 느끼지만 당사자인 요셉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노력입니다. 총리가 되는 사실은 요셉도, 보디발도 그 집에 오는 손님들도 생각도 못할 일입니다.

요셉은 적당히 적응한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여 형통함을 보디발이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자식이 없던 보디발은 요셉을 아껴 가정 총무로 삼고 모든 소유를 요셉에 손에 맡깁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 일을 맡은 후에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쓴 것이 아니라 정말로 보디발의 집을 위해 관리합니다.

어려운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요셉을 잘되게 하시는 것보다 요셉이 있을 곳을 잘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럼으로 그 주변 사람에게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 복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을 혹시라도 불이익이 올까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내가 잘되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인정받고 성공하기보다는 가는 곳마다 잘되게 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복을 몰고 다니는 복덩이가 되길 바랍니다.


2. 보디발 부인의 유혹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요셉을 함부로 대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 전처럼 허름한 노예의 옷이 아니라 집안의 총무로서 좋은 옷을 입는 사람입니다.

한편으로 야곱이 왜 요셉을 더 사랑했을까 생각해보면, 노예신분이었던 말도 안통하던 요셉도 존귀하게 대하는데 야곱은 91세에 자기가 사랑한 여인이 낳은 아들인데다 이렇게 행동한다고 상상을 해보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보디발 집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17세 소년은 27세의 청년이 되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매력적인데다 성실하고 옷까지 잘입혀놓으니 혹할 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문란한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에서 친위대장의 역할은 왕은 물론 왕비와 왕궁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자리이기에 거세를 해야 했습니다. 보디발은 왕의 측근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 실세이지만, 그는 남자의 구실을 할 수 없는 불행한 환관입니다.


그런 보디발이 결혼을 하고 아내를 있다는 것이 모순입니다. 보디발도 불행하지만 그의 부인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남편 몰래 비밀스러운 사랑(?)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마 보디발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그 집안의 대부분의 사람은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요셉을 유혹할때 그 큰 집에 아무도 없었다는 기록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눈에 양냄새 풍기고 말도 제대로 못하던 요셉의 변화가 눈에 들기 시작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틈만 나면 요셉와 잠자리를 가지려고 유혹을 하기 시작하고 요셉은 지혜롭게 그를 피해다니기 시작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참 아이러니하게도 요셉이 그럴수록 더 강하게 요셉을 가지려고 합니다.


어느날 보디발의 부인은 집안의 모든 사람을 내보내고 요셉을 부릅니다. 요셉도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채고 그에게 이야기합니다. (창39:7-9)


노예였을때는 무시당했으나 성공했을 때는 유혹합니다. 고생할때는 유혹받지 않습니다. 고생이 끝나는 순간 유혹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고생할 때보다 위험할 때는 고생이 끝나고 일이 잘되고 있을 때입니다.


번영의 때에 더 많이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고난중에는 유혹에 관심을 둘 여력도 없습니다.


요셉은 사랑을 줌으로서 더욱 몸이 편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안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알고 있고 함께 동참한 자들도 많을 것입니다.


내 주변에 누구누구도 그렇게 한다 다들 그런다 하는 말로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때에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혹받지 않을 때는 유혹을 이길 것이라 하지만, 사탄은 우리의 이성으로 이길만큼 단순하게 유혹하지 않습니다. 아주 천천히 감정을 주무릅니다. 모르는 사람을 통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을 통하지 않고 비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나름의 이유와 당위성을 주면서 유혹합니다. 그래서 유혹인지도 모르고 넘어가게 만듭니다.

"유혹에 맞서본 사람만이,
유혹이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안다."
-C.S 루이스-

유혹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지혜와 영성을 갖추기 위해 우리는 쉬지않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유혹인줄 알 때에는 과감하게 물리칠 수 있는 담대함을 가지기 위해 기도합니다.


보디발의 아내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겁니다. 감히 히브리 노예에게 훈계를 들은 것도 모자라 자신을 더러운 것 보듯이 자신이 잡은 옷까지 벗어던지고 도망가버린 사실에 분노합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누명이 씌웁니다.


비명을 지르며 사람들을 불러모아 요셉이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요셉은 잡혀옵니다. 사람들은 아마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습니다.


유혹을 이기면 형통할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유혹에 실패한 유혹자는 분노합니다. 자기의 실패를 복수합니다. 넘어가지 않은 사람을 곤란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현실도 유혹을 이긴자보다 유혹에 넘어간 자들이 더 형통하고 승승장구 하는 것 같습니다.


보디발은 모든 상황을 전해듣고 자신의 부인의 말을 듣고도 자신의 부인의 말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10년간 봐온 변명조차 하지 않는 요셉을 믿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내의 비밀스러운 행동을 알고도 묵인했던 것은 아내를 추궁하고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사내의 구실을 못하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고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요셉의 억울함을 눈치채더라도 아내의 손을 들어줘야 합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잡아 역적들을 가두는 감옥에 가두라 명합니다. 사실은 이것이 요셉을 위한 보디발의 최선의 행동입니다. 자신의 아내를 겁탈하려던 노예가 현장에서 잡혀 증거까지 있는데 그 자리에서 죽인것이 아니라 살려서 감옥으로 보냅니다.


요셉은 잠잠합니다.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너무나 궁금합니다. 예상되지 않는 성품입니다. 형들에게 팔릴때에도 그렇고 누명을 쓸 때도 그렇고 미련합니다. 호구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지혜롭기도 합니다. 형들이 팔아넘길때에 반항했다면 맞아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보디발의 결정에 반항했다면 그 자리에게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변함없는 요셉이 부럽습니다. 잘되고 있을 때에 한번만 눈 딱 감으면 더 잘되는 기회가 왔는데 한순간도 한눈을 팔지 않는 그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주님을 향해 가는 외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 보기에 존귀한 자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려고 나약해지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듣고 인기 좋을 때에도 연연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가신 예수님처럼, 말도 안되는 억울한 일을 당하는데도 한마디 변명하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의 목숨을 맡기던 것이 닮았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 요셉은 감옥에 들어갈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역적들이나 가는 감옥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심 안에서 요셉은 역적들의 감옥에 들어가야 합니다. 애굽을 다스릴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별볼일 없는
그저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애굽을 사랑하기에 직언을 하다가 잡혀온 자도 있고, 학문을 위해, 경제를 위해, 애굽의 안보를 위해 바른 말을 하다가 잡혀온 자들이 있습니다. 요셉의 감옥살이는 그들을 만나 지식을 얻게 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들은 지식으로 후에 바로왕 앞에 섰을 때에 요셉은 단순히 꿈을 해석하는 노예가 아니라 애굽의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방법까지 제시할만한 지혜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억울해서 견딜 수 없고
죽고싶은 마음이 들고 계신가요?

최선을 다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고
원망의 마음이 드시나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나요?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고 믿음 없는 생각입니다.

지금 그 상황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기에
하나님이 만드신 상황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적당히 유혹에 넘어가
보디발의 집에서 권세를 누리는 종으로 남겠습니까?

아니면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이 보내신
역적의 감옥에 갇히시겠습니까?


3. 감옥에서도 성실한 사람

보디발의 마지막 배려는 요셉을 죽이지 않고
감옥에 가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노하지만 사실 그 분노는 요셉이 아닌
그의 문란한 아내와 그 일을 숨긴 집안의 다른 자들을 향한 분노입니다.

내 아내와 간통한 자는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엄포입니다.

감옥에 갇힌 중에도 요셉은 좌절하지도 않고
염세적이지도 않고 누군가를 맹렬히 비난하고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희망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처한 현실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합니다.

죽지만 않았지 죽은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면서
감옥에 들어온 자들을 보살피고 관리합니다.

좌절에 빠진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기에
감옥에서도 요셉은 간수장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됩니다.

아예 감옥의 모든 일을 요셉에게 맡겨놓고
맡긴 것을 확인하지 않을 정도로 신뢰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평안할때는 그 누구보다 좋은 사람이었던 사람도 고난과 환난 속에서는 날이 서고 변하기 마련입니다.

요셉의 태도를 닮길 소망합니다.

아주 작은 불합리에도 불평 불만을 품고
남들과 대립하고 다투던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린 알 수 없습니다.
요셉이 왕의 감옥에 갇힌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입니다. 그러나 그 계획에는 성실한 요셉의 태도로 보디발의 신뢰와 사랑을 받아야 함이 필요합니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절제와 인내와 믿음또한 필요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보전할 억울함 가운데도 침묵할 처세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느날 갑자기 준비되지 않는 자에게 로또 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의 준비과정입니다. 그 시간을 남탓만 하면서 불평 불만만 하고 사회를 원망만 하며 시간을 보낼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며 최선을 다하며 기다릴지는 하나님의 일이 아닌 우리가 해야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