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걷다> 사무엘상 5-8장, 사순절 <40일 Salt 3.3 캠페인>
1.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큰 곤란을 겪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법궤를 모셔와서 전쟁을 승리로 바꾸자고 해서 법궤를 모셔옵니다. 그리고 더 큰 패배를 당했다는 것이 사무엘상 4, 5장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어떤 대적이라도 이길 것이라고 기대했고, 하나님은 그 기대를 외면하셨습니다. 블레셋도 이스라엘도 이것을 마치 하나님이 패배하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낳은 아기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짓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영광이 무너졌다.’, ‘우린 망했다.’입니다. 이 이름에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의 현실적인 통치에 대해서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2. 그런데 5장에 와서 보면 하나님은 잡혀간 곳, 블레셋의 중심부인 다곤의 신당에서 일하십니다. 다곤 신의 제사장들이 아침에 일어나 신전에 가보니 다곤에 엎드러져 법궤 앞에 절하고 있는 겁니다. 그 이튿 날도 그렇고… 이로 인해 당황하게 된 블레셋은 7개월 만에 법궤를 돌려보냅니다. 이 문제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잘못했으니 벌을 받았고, 하나님은 블레셋의 다곤을 무릎꿇림으로 이스라엘의 승리를 약속하셨다고 쉽게 엮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3. 이스라엘의 기대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에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기대를 하나님께서 정면으로 거부하신 것입니다. 이게 왜 중요한가? ‘우리의 믿음이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을 더 잘 믿으면 되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빗나간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인생에서 그렇게 쉽게 답이 얻어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4. 오늘 우리의 기독교 신앙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기독교 역사 안에서 가장 큰 시험 중에 하나가 ‘승리주의’입니다. 이 승리주의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뿌리가 깊습니다. 박해 중에 고난 당하던 초대교회가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 때에 로마의 국교가 됩니다. 박해 속에서 순결했던 교회가 박해가 끝나고 그 평화를 유지할 실력을 잃게 됩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부터 기독교는 ‘생명’을 잃어가고 ‘교양’이 되어버립니다(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Williston Walker). 정말 큰 문제는 성공한 후에 시작되는 법입니다. 이때부터 교회는 모든 경우에서 승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구별됨 이라고 착각했습니다.
5.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고, 높으심이 증거되며, 우리는 그 보상을 가져야 하는 것, 반대로 실패나 고통이 생기면 우리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승리주의’입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 신안은 보이는 것의 싸움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사무엘상 4-5장의 사건은 ‘승리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가 두드러지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패배를 요구하십니다.
6. 기독교 신앙은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승리자가 된다. ‘예수님을 믿음 -> 승리’ 이렇게 가지 않습니다. 이렇게 갑니다.
‘예수님을 믿음 -> 성도, 하나님의 자녀 다워 짐’
이렇게 가는 겁니다. 다음 말씀이 좀 길어도 어느 쪽으로 가는지 방향을 생각하면서 걸어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도둑질 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고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여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에베소서 4:17-32)
무엇에 대하여? 세상 모든 것에 대하여 이렇게 하라는 겁니다. 정치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경제에 대해서, 문화에 대해서… 알아듣는지… 상기한 내용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이 주옥 같은 신앙생활의 내용들은 ‘승리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가 당하는 위기 속에서, 커다란 시험 속에서 이것들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7. 승리주의와 반대의 길을 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서 오해 받고, 수치를 당하고, 억울한 자리까지 가시고, 수난을 당하시다가 죽으십니다. 그러면 그분이 무엇을 하셨습니까? 당신이 하실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그리하실 수 없습니다.’라고 외친 베드로에게 주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에서마저 오른손 들게 하고 이 헛된 충성서약을 하는 시대에 우리가 속해 삽니다.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으신 주님같이, 우리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상기한 말씀대로 묵묵히 걸으시면 됩니다.
8.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성도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통하고 승리해야 증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이가봇’이고, 블레셋의 다곤 앞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일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 봐!’라는 자리에서 주님은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승리의 수단으로 부르시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사는 자로, 구별된 자로, 거룩한 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9.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도 우리가 만나는 현실은 믿기 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망은 여전히 힘을 쓰고, 세상의 가장 큰 무기이고 협박입니다. 우리에게 달라진 것은 그때는 몰라서 진 것이고, 지금은 알고도 진다는 사실입니다. 왜? 우리에게 그 사망의 끝은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10. 각오하고 현실을 사십시오. 오늘 당하는 현실 앞에서 더러운 말과 악의를 접고 의심과 변명을 접고 사십시오. 그것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내는 것’이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그 일 안에서 우리는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삶을 여러분의 인생에 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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