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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사무엘상 9-12장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사무엘상 9-12장, 사순절 <40일 Salt 3.3 캠페인>

1.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너희를 애굽인의 손과 너희를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셨거늘 너희는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의 하나님을 오늘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는 도다” (사무엘상 10:18-19a)

사울 왕이 등극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왕을 세우는 일을 싫어합니다. 하나님도 싫어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데 하나님은 열심히 주도권을 행사하십니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결국 다윗을 세우실 거면 왜 사울을 세우셨느냐는 것입니다.

2. 사울은 자신이 왕이 되는 것에 대해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사무엘이 그를 왕으로 세우겠다고 하자 그는 놀랍니다. 그리고 자기는 베냐민 지파이고 열 두 지파 중에 가장 작은 지파이며 자기 가문에 유력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자기가 왕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세가지 징조를 들어 재차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일이 하나님이 주장하신 것이 됩니다.

3. 이 문제가 특별한 것은 사울이 실패한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앞으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사울은 정치나 권세와 상관없는 순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를 다 책임지지 않으십니다. 다윗이 처음부터 왕이 되어서 모범적인 선례를 남기면 되는데 사울이 먼저 왕이되고 실패하고 그리고 나서 다윗이 왕이 됩니다. 이게 무슨 메세지일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고 그를 실패하게 하십니다. 이 일은 우리 모두에게 신앙 현실로 대면하는 문제입니다.

4.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시고 수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했나요? 그렇게 하실 수 밖에 없었다면 구원받은 우리가 그 다음에 형통만 하고 완전해져야 하지 않을까? 죄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살았던 것도 한심한데, 믿고 나서 더 한심해지지 않았나요? 소원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일을 이렇게 하실까? 이런 질문들이 마구 쏟아져 나와야 합니다.

5. 우리는 사울과 다윗을 통해서 실패와 성공을 구속사의 관점에서 풀어낼 수 있습니다. 먼저 한나의 기도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이 사건들이 연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기도하여 낳을 수 없었던 자식을 낳습니다. 그가 사무엘입니다. 한나의 기도를 보십시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권세자가 하루 아침에 꺽일 수가 있고, 아무것도 아닌 자가 권세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누구를 꺽어 무너뜨릴 수 있고, 누구로 하여금 새로운 어떤 대업을 혹은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불연속’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질서, 윤리, 합리성이 여기서는 소용이 없는 것으로, 그것이 무용한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큰 것을 한나가 8절에서 고백합니다.

6.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한나는 <창조의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이 창조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질서에 매이지 않고 질서를 넘어섭니다. 이것이 <창조>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인과율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과율보다 크십니다. 그것을 한나는 <창조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7. 우리는 사울에게 있었던 실패와 다윗의 승리가 창조의 통치와 어떻게 맞물리는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사울에게서는 무너뜨리시는 하나님이 나오고 다윗에게서는 세우시는 은혜와 부활의 하나님이 보입니다. 이 두가지가 신약에서 결론으로 맺어집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오면 이 둘이 하나로 묶입니다.

8. 이것을 신약의 바울에게로 가서 적용해봅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회심하게 되었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메섹 사건을 잘보면 사울이 회심한 것이 아니라 그가 꺽이는 사건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악랄하고 무서운 박해자였습니다. 그날도 예루살렘에서 그랬듯이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기 위해 살기등등하게 다메섹을 지납니다. 그는 거기에서 아무런 준비나 조짐도 없이 찍혀 넘어가는 고목같이 무너집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꺽으심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세우십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택하신 종이 되어서 신약에서 우뚝서게 됩니다.

9. 한 인생, 한 인물에게서 두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 안에서 무너짐과 세워짐이라는 두가지 사건을 봅니다. 지금 우리가 걷는 사무엘서에서 이 두가지 사건이 사울과 다윗으로 나누어져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나쁜 놈, 다윗은 좋은 놈이라는 관점에서 더 나가야 합니다.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라 더 나가야 하는 얘기라는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이 섞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핍박하듯이 우리 안에 사울이 다윗을 핍박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다윗이 자라납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이게 깊은 자아성찰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불완전한 나>입니다. 자책이 있고 시원치 않습니다.

10. 내 인생에 사울과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을 증언하십니다. 이 부분에 공감되어야 자라나는 것입니다. 나를 사용해서 세상을 구하시는 것보다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서 나를 증거로 삼으시는 겁니다. 기독교는 자기 신뢰에서 나오는 공갈이나 공포가 되면 안됩니다. 바울의 겸손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자기가 새사람이 된 것에 대해서 그가 과거를 극복하고 흠결없는 새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무지, 무능, 어리석음, 연약함이 자기 속에 그대로 남아서 “오호라!” 라고 애통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속에 그대로 남아서 괴롭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실존의 자리에서, 거기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걸로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창조를 담아내십니다. 빌립보서에 가서 봅니다.

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오해와 누명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은 부활을 담으셨습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환상 속에 담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에 부활을 담으셨습니다.

12. 기독교 신앙의 진수는 내 인생의 연약한 부분, 못난 것, 슬픈 것에서 진지하게 사는 것입니다. 지금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그것으로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일하십니다. 부러워말고, 아니 부러움을 극복하고 자기 인생을 사십시오. 내가 처한 형편때문에 내가 가진 믿음의 크기를 놓치지 마십시오. 당신은 중요하고, 아름답고, 존귀합니다.